항일무장 유격대 당시 김일성 지위 높지 않았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생전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다. 권력의 본질이 물리적 폭력의 장악에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김일성과 최현의 관계를 볼 때 이 명제는 “권력은 총구를 잘 다루는 인물을 거느린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말로 수정되어야 할 듯 싶다. “총소리가 나는 곳에 최현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최현은 전투에 능했다. 그러나 최현은 26세인 1933년 김일성을 처음 만나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인 김일성의 언변에 속아 넘어가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최현은 수 차례에 걸친 자위단 습격과 일본군 토벌대와의 전투, 무기 탈취 공작 등으로 인해 유격대 내에서 유명해졌다. 예컨대 1933년 봄에는 구룡평 공안국 습격을 주도하여 공안국장을 생포했으며 다수의 총과 무기들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같은 그의 실력은 김일성에게도 보고됐다.

1933년 9월 김일성과 최현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소왕청 유격 근거지 마촌에서였다. 당시 김일성은 21세의 약관이었고 최현은 그보다 다섯 살 많은 26세였다. 그럼에도 최현은 이전부터 김일성이 항일유격대 내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은 것으로 오인하고 그에게 존칭을 썼다. 김일성은 19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기 전까지는 김성주라는 이름을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현이 김일성을 만난 시점은 김일성이 개명한 지 2년 여 후이기 때문에 최현이 알고 있던 김일성이 김성주였는지 항일운동의 전설적 인물이었다고 전해지는 다른 김일성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글에서는 김일성 진위논란에는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나 당시 최현은 김일성의 개명 여부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에는 당시의 김일성-최현 관계가 잘 나타난다.

“(중략) ‘젊은 사람을 보고 님이라니요. 그저 김일성이라고만 불러주시오.’ 내가 이런말로 겸양의 뜻을 표시하자 온몸에서 화약내가 물씬 풍기는 이 노병은 큰일이라도 난것처럼 펄쩍 뛰었다. ‘여기에 나이가 많고 적고가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김대장을 조선군대의 상좌에 모신 지 오랩니다. 그러니 함자를 높여 부르는것이 마땅합니다.’ ‘젊은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춰주면 인차 교만해지고 현훈증에 걸립니다. 동무가 계속 그런식으로 나를 춰올린다면 나는 다시 동무를 상대하지도 않겠습니다.’ ‘이것 참, 나도 배짱이 센 사람인데 김대장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럼 김대장 소원대로 이제는 말을 낮추겠습니다.’ 그때부터 최현은 말투를 고쳤다. 그는 한다면 하고 안한다면 안하는 전형적인 무관기질의 사나이였다. 그가 나에 대해 경어를 사용한 것은 다만 공식석상에서뿐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우정에서 거치장스러운 예의와 격식을 제껴놓고 오히려 그 우정에 진실성과 참신성을 부각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다물속에서 진주를 캐내듯이 한 명 한 명 힘들게 채취해내는 동지가 우리 혁명의 황금으로 되고 혁명을 확대하고 상승시키는 필수불가결의 추진력으로 되고 있던 그 시절에 최현과 같은 장부를 동행자로 얻게 된 것은 분명 나의 생애에 특기할만한 사변이요, 행운이였다. 마촌에서의 상봉은 처음부터 나에게 커다란 만족감을 주었다. 첫 상봉치고는 그 상봉이 일으킨 충격과 심도가 너무나도 깊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초면 손님인 최현이 자꾸만 구면 인물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음성도 귀에 익었고 생김새나 몸가짐도 몹시 눈에 익어보였다. 지어는 언제인가 이 늠름한 대장부와 함께 항일을 논하고 구국을 운운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 생각조차 들었다. 최현이 나에게 구면 인물처럼 느껴지게 된 것은 그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내가 그때까지 머리속에서 줄곧 그려보고 하나의 형상으로 완성시킨 전형적인 무관의 모델에 가까왔을 뿐 아니라 내가 간도땅에 와서 최현의 과거와 관련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온데서 생긴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중략) 최현이 첫 상봉을 통하여 나에게 남기고 간 인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그가 매우 솔직하고 소탈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보는 대로 말하고 생각나는 대로 표현하는 사나이었다. 그의 사상과 감정은 순간 순간마다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나곤 하였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는 기만도 조작도 외교도 다 통하지 않는 법이다. 최현의 어린애와 같은 단순성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이상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매력에 끌린 나머지 나는 자기의 속마음을 최현에게 송두리 채 퍼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세기와 더불어 4′ (조선 로동당 출판사, 년도 불명), 5. 백전로장 최현 파트.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에서 두 가지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첫째, 최현은 김일성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그의 명성을 들어왔고 그에 대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일성과 최현의 대화를 면밀히 살펴보면 1933년 당시 김일성이 항일무장 유격부대 내에서 높은 지위에 있지는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만일 김일성이 최현의 얘기처럼 실제로 조선군대의 상좌격인 고위직에 있었다면, 김일성의 수차례에 걸친 만류에도 최현은 그를 깍듯이 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배짱이 센 사람인데 김대장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럼 김대장 소원대로 이제는 말을 낮추겠습니다”라는 최현의 얘기로 미뤄볼 때 김일성은 유격대 내에서 대단한 위상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난다. 실제로 그랬다. 김일성과 최현이 처음 만났던 당시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은 신입이었다.

“1931년 초 조선혁명군 길강성 지휘부에 속한 부대에 있었던 김성주(김일성-필자)는 부대가 괴멸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사는 안도로 돌아왔다. 1912년생인 그는 이 해에 19세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와다 하루끼 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비평사, 1992), p.86.

그러나 북한에선 1931년 12월에 개최된 ‘명월구 회의’에서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의 전략적 방침을 제안하는 연설을 발표했다고 선전하며 그 연설문의 원본도 공개했다. ‘金日成主席革命活動史’ (평양: 외국문출판사, 1980), pp.26-46). 하지만 김일성이 그 회의에 참가했다는 것 이상의 내용은 믿기 어렵다. 그 까닭은 1931년 초에 중국공산당에 갓 입당해서 그 같은 중대 연설을 발표할 만큼의 위상을 지니게 됐다는 점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김일성은 최현을 처음 만나 그에 대해 대단히 인상적인 이미지를 지니게 됐다는 점이다. 김일성은 바다 속에서 진주를 캐닌 것과 같은 환희를 느끼며 최현을 ‘늠름한 대장부’로 묘사하고 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최현의 어린 시절 무용담을 기술하며 최현을 극찬했다.

“(중략) 그 절망적인 암흑의 시대에 한 가닥의 희망으로 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간도 일각에서 무력항쟁에 고심하고 있던 독립군의 존재였다. 홍범도와 임병국은 그의 선배였고 스승이였다. 최현의 어린 시절은 용감하고 굴할줄 모르는 이 노장들의 활동과 떼려야 뗄 수 없게 튼튼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이 노장들에게서 사격법도 배우고 용마법도 배웠다. 홍범도의 수하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최화심은 최현이 11살이던 해부터 어린 아들에게 통신연락을 시켰다. 최현은 그 해에 아버지한테서 한 자루의 권총을 선물로 받아안았다. 경신년대학살은 조선의 교포들이 할거하고 있던 간도의 방방곡곡에 피비린내 나는 흔적을 남겨놓았다. 최현도 그 ‘토벌’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임병국의 부대를 따라 연해주로 넘어갔다. 산천도 설고 사람도 설고 말도 설었으나 한생을 일제와의 싸움에 바치려는 최현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임병국 대장은 그를 연락병으로 임명하여 수하의 한 지대에 파견하였다. 용마술이 남달리 뛰어난 최현은 말을 타고 지대와 본부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연락병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당년 13살에 불과한 이 앳되고 왜소한 소년이 말을 타고 광야로 쏜살같이 달려갈 때면 로씨야(러시아)사람들도 경탄과 선망에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곤하였다. 한 번은 그가 통신연락 임무를 받고 말을 탄 3명의 동요들과 함께 빗발치는 탄막을 헤치며 최전선으로 돌진한 적이 있다. 일행 중 3명은 적탄에 희생되고 최현은 팔에 부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상자리를 돌볼 사이도 없이 탄우속을 뚫고 과감하게 앞으로 달려 본부에 책임적으로 통신을 전달하였다. 임병국은 최현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며 독립군의 장군감이라고 그를 치하해주었다.”– 김일성,’세기와 더불어 4’ (조선 로동당 출판사, 년도 불명), 5. 백전로장 최현 파트.
   
김일성을 처음 만났을 때 최현은 그에게 국제정세와 혁명이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깊은 존경심을 지니게 됐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의 발언은 대부분 중국공산당 당국의 지시나 방침을 그대로 전달한 것이었다. 최현이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결정적인 계기는 최현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투병하고 있을 때(1936년)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중략) 내가 첫눈에 마촌에서 새겨두었던 옛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변모되어 있었다. ‘김대장, 부탁입니다. 들어오지 마시오! 들어오면 안 됩니다.’ 최현이 두팔을 내저으며 불이 황황 이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지켜보는 바람에 나는 한동안 출입문 앞에서 주춤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박달방치 같이 단단하던 최현이가 장티프스라니 웬일이요?’ 내가 머리맡에 다가 앉으면서 악수를 청하자 최현은 모포 밑으로 황황히 손을 움츠러드렸다. ‘김사령, 내 몸엔 장티프스 벌레가 씨글씨글하오. 제발 내살에 손을 대지 마시오. 전염병 창고 같은 이 잘난 미혼진에는 어쩌자구 오셨소?’ ‘어쩌자구 왔겠소. 최현을 보고 싶어서 왔지. 세상에 별 일도 다 있구만. 최현이 전염병에 다 걸리다니.’ 나는 모포 밑으로 손을 밀어넣어 화독처럼 달아오른 최현의 손을 덥석 잡아쥐고 오랫동안 놓지 않았다. 최현의 눈에는 금시에 눈물이 핑 돌았다. ‘김사령, 반갑소. 이 잘난 최현이가 뭐게…난 김사령을 못보고 저승에 가는가 했소.’ 방금 전까지 곁에 오지 말라고 애원하던 그가 인제는 내 손을 집게처럼 꽉 잡아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의 최현은 영낙 없는 어린애였다. (중략) ‘열병을 앓는 동안 나는 죽을 고비를 여러번 겪었소. 병이 심할 때면 죽고싶은 생각도 났소. 죽으면 만사가 끝장이고 이런 고통도 더는 겪지 않을 텐데 하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에 잠길 때도 없지 않았소. 그런데 오늘 김사령을 만나는 바람에 그런 잡념이 다 달아나버리고 말았소. 김사령 얼굴을 보니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고 살아서 끝장을 봐야겠다는 배심이 생기오.’ 최현이 나에게 한 말이었다.”–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4 (조선 로동당 출판사, 년도 불명), 5. 백전로장 최현 파트.

이 같은 김일성과 최현의 만남은 1936년 3월 초의 일이었다. 안도현 미혼진 밀영 병원에서 최현이 투병하고 있을 당시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 1933년 9월이라고 할 때 이들은 2년 반 만에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는 말인데 대화 내용을 볼 때에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랜 기간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질 법한 살가운 정이 녹아있는 대화다. 다시 말하면, 이들의 대화 역시 왜곡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됐듯이, 첫 만남에서 최현이 김일성의 만류에 말을 낮췄다는 점이나 최현의 말투 등을 미뤄보아 나이 많은 최현이 김일성을 당시에는 하대(下對)했을 개연성마저 있다. 차후에 김일성의 지도자로서의 자상함과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두 사람의 대화가 조작 기술됐을 수 있다는 얘기다. 자신의 회고록에서 최현이 김일성을 시종 ‘그이’ 혹은 ‘김일성 동지’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 역시 이 같은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한편, 김일성 역시 최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다소 오버하여 표현하고 있다.

“(중략) 최현은 일생 동안 내곁에 있고 싶어하였으며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그의 그런 시도는 그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현실적인 다른 유혹에 매번 자리를 내주곤하였다. 그 유혹이란 바로 내가 걱정하고 관심하는 가장 준엄한 최전선에 자기를 세우고 싶어하는 수정처럼 깨끗한 양심의 충동이었으며 헌신적인 복무정신이였다. 우리를 측근에서 받들어주고 싶어하면서도 우리가 부르는 가장 어려운 초소에 자기가 선참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다른 일욕심, 여기에 바로 최현의 충신다운 면모가 있었고 그의 인간미를 장식하는 특출한 매력이 있었다. 그 두 가지 욕망은 한평생 그의 마음속에 쌍둥이처럼 동거하면서 끝없는 힘내기를 해왔다. 최현은 두 욕망을 다같이 지지하면서도 어려운 일이 제기되면 매번 내곁을 떠나 내가 중시하는 초소로 주먹을 쥐고 달려가곤하였다. 이것은 분명 최현의 일생을 관통해온 유쾌한 모순이었다. 인민무력부와 정무원의 부장직에서 나의 사업을 보좌한 말년을 제외한다면 그의 온 생애는 초연이 자욱한 최전방에서 흘러갔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는 1930년대 후반기에만 하여도 수백번의 전투를 하였다. 삼도구전투, 5도구전투, 소탕하전투, 황구영전투, 금창전투, 붉은바위전투, 곰의자리전투, 간삼봉전투, 나루훈전투 로금창전투, 무치허전투, 푸르허전투, 위탕거우전투, 천보산전투, 대사하, 대장강전투, 요차전투, 한총구전투 등 수백회의 대소전투들은 모두 최현의 이름과 련결되여있으며 탁월한 군사지휘관으로서의 그의 재능과 무비의 용감성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4’ (조선 로동당 출판사, 년도 불명), 5. 백전로장 최현 파트.

항일무장투쟁 시기에 국한된 회고록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김일성-최현 관계는 북한정권 수립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됐다. 향후 오랜 기간 동안 최현은 김일성과 막역한 사이로 지냈던 것이다. 김일성-김정일 패밀리와 친분이 두터웠던 중국의 한 유력인사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릴 적 평양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데, 김일성 주석이 최현과 함께 있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최현이 김 주석에게 ‘일성아!’라고 부르는 것도 여러 차례 들었다. 김 주석을 그렇게 호칭하는 건 최현이 유일했다. 그래도 주변에서 어느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김 주석 역시 최현을 거리낌 없이 친구로 대했다.” 

이렇듯 혁명 1세대 중에서도 최현은 김일성과 유독 각별한 관계였다. 심지어 김일성은 훗날 김창봉의 반란 미수사건 당시 최현에게 반란세력 숙청과업까지 맡길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탈북자 출신 시인 장진성 씨에 따르면, 1968년 말에는 민족보위상(국방장관)이던 김창봉의 주도로 무장 쿠데타가 벌어질 뻔한 직전의 상황까지 발생했다. 김일성은 1969년 1월 김창봉과 그 반란세력을 숙청하는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최현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최현은 그 보답으로 수령절대주의와 장남 세습에 앞장섰다. 최현이 없었다면 김정일은 1969년 여름에 열린 비공개 당 확대회의에서 비로소 당 조직부 과장직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일이 최현의 아들 최룡해를 평생 자기 왼팔로 둔 것도 바로 그런 인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