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았다. 남-북-미 정상들은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회동했다. 역사의 진전이자 새로운 국면의 전개 가능성을 시사해준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장면들만 보고 장밋빛 환상에만 들떠 있을 순 없다. 냉철한 현실 인식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작금의 역사적 사건은 향후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상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어가고, 남북미 정상들이 판문점에서 회동한 역사적 사건의 배경에는 각자의 국내 정치적 계산이 녹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통령 재선을 앞두고 있었고, 김정은은 제재의 지속으로 인한 주민 동요에 직면해 있었으며, 문재인 대통령은 경제 실정이 부각되는 가운데 내년 총선 승리의 확실한 모멘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DMZ 방문은 예정돼 있었다. 관심은 김정은과의 짧은 회동이 성사될지의 여부와 문재인 대통령까지 포함한 남-북-미 정상회동이 처음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였다. G20 정상회의 첫날인 28일까지도 트럼프 대통령은 DMZ 방문 의사는 밝히면서 김정은과의 회동 여부에 관해서는 확실한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G20 정상회의, 특히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의 무역협상 재개가 결정된 후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을 만나보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역사에서 가정은 금물이지만, 만일 미중 정상회담에서 무역협정 쟁점이 또다시 불발됐다면 어땠을까. 시진핑 주석과 얼굴을 붉힌 후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와서는 김정은을 만나려 했을까. DMZ를 방문해서도 북한을 향해 대화보다는 제재 메시지를 보냈을 공산이 컸다. 그러나 G20 회의에서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트럼프 대통령의 시선은 미국 국내정치를 향하고 있었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목표로 하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한반도에서 커다란 외교 업적을 남긴다면, 재선 가도에 청신호가 켜질 것으로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은 처음부터 G20 정상회의와 한국 방문을 자신의 대통령 재선과 긴밀히 연계시켜 생각했을 수 있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민주당 대선 후보 TV 토론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후보 난립으로 누가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올라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와 안보에서 확실한 실적을 거둔다면 2020년 대선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G20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대한 추가 관세도 유예하고 중국 통신회사 화웨이에 대한 제재 완화도 시사하면서 중국과의 무역협상 재개를 끌어냈다.
G20 정상회의를 마친 후 한국에 온 트럼프 대통령은 곧바로 김정은과의 만남을 희망했다.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고 김정은의 여러 가지 계산이 맞아떨어지면서 사상 초유의 남북미 정상 만남이 성사됐던 것이다. 김정은은 대북 제재의 지속으로 인한 대내적 불만을 잠재우고 주민들에게 제재 완화에 대한 기대를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정권 안보를 위해선 내부 동요의 차단과 결속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을 북녘땅으로 불러들였다는 사실을 선전하면서 자신의 외교력을 과시하는 효과도 의식했을 것이다. G20 정상회의 결과 중국이 미국과의 전선을 확대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나타났기 때문에 김정은도 굳이 중국의 대미 전략에 반하는 행보를 이어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중재자’ ‘촉진자’ 역할이 성공적임을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국내적으로 청년 실업, 수출 부진 등의 경제 실정이 부각되면서 내년 총선 전망이 어두운 상황에서 문 대통령은 북한 비핵화 문제를 중심으로 한 외교 분야에서 가시적인 업적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이 구상하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한 축인 미북 대화가 재개된다면 주춤했던 남북관계도 다시 동력을 찾을 것이고 여권 내부에서는 총선 승리의 희망도 커질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수 있다. 문 대통령의 구상 속에선 일단 미북 대화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은 예상됐던 대화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형식적인 인사치레만 주고받았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몇 가지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제재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이후에도 이 점을 명확히 밝혔고, 김정은과의 53분 회담이 끝난 후에도 협상을 하다 보면 해제될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대북제재의 완화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북한의 비핵화가 전제되는 것으로 협상의 실질적 성과를 강조했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을 서두르지 않겠다면서 미국이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날 김정은과의 회담 후 트럼프 대통령은 포괄적 타결에 합의했다면서 김정은도 만족해했다고 밝혔다. 최근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동시적, 병행적 진전을 위해 북한과 논의할 준비가 돼있다”고 언급한 내용을 두고 미국의 비핵화 기조가 유연해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미국 비핵화 전략의 후퇴를 불식시키는 것이다.
셋째,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을 미국으로 공식 초청했다. 김정은이 미국을 방문하게 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외교 업적을 추가해주는 호재가 될 것이다.
이처럼 볼 때 이번 판문점에서 이뤄진 사실상의 3차 미북 정상회담과 남북미 정상들의 판문점 회동은 모두가 윈-윈-윈하는 게임이었다. 적어도 그들의 국내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그랬다. 이번 역사적 회동이 진정으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를 끌어내는 단초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그러나 향후 프로세스가 또다시 난관에 부딪히는 경우를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해 6월 12일 사상 최초로 미북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의 환희와 감격과 그 후에 전개된 미북관계 및 남북관계를 찬찬히 돌아보면, 어제(6월 30일)의 감동이 얼마나 갈지 벌써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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