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抗日투쟁 이렇다 할 가시적 성과없어

1933년 가을 최현이 김일성을 처음 만나고 돌아온 직후부터 일본군의 유격대 토벌이 더욱 강화됐다. 그해 겨울부터 이른바 ‘동기 토벌’이 강력히 추진됐는데 그 이전인 가을에는 전초전 격인 ‘추기 공세’가 시작됐다. 일본군 토벌대의 추격에 따라 항일 유격대는 쫓고, 쫓기는 공방전을 거듭하며 점점 궁지로 몰리게 된다. 급기야 일본군은 1933년 12월경부터 동만 각 현 유격 근거지들에 수만 명의 대병력을 투입하여 동기 토벌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각 유격 근거지들에 대해 작전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왕청 지구 소왕청 근거지에 자신들의 주력 부대를 투입하여 왕청현 유격대를 섬멸하는 작전을 먼저 시행했다. 소왕청은 동만 유격대의 근거지로 김일성이 거처하고 있는 곳이었다. 최현의 회고록에는 당시 일본군 토벌대와 왕청현 유격대의 전투에서 김일성이 직접 지휘하여 적들을 500명 이상 살상하는 대승리를 거뒀다고 언급돼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최현의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어렵다.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해 최현이 전투 결과를 왜곡, 조작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현 자신이 직접 겪은 일에도 다소 과장된 기술이 없지 않다. 당시 일본군의 동기토벌에 맞서 최현이 치른 전투 가운데에는 ‘의란구 근거지 방어 전투’가 큰 규모의 전투였다.


“(중략) 12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적 토벌대가 사방에서 우리 의란구 유격 근거지를 포위하고 침공해 온다는 정보를 받고 4명의 대원과 함께 급히 산 능선을 따라 놈들이 침공해 온다는 고성천 골짜기로 맞받아 내려가 보았다. 적들은 벌써 골짜기를 누렇게 덮고 후미진 계곡의 막바지로 몰려들고 있었다. 가소롭게도 적들은 박격포로 위엄 사격을 하면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어림짐작으로도 500~600명이나 되는 놈들은 중기와 경기로 장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다섯 사람밖에 없었다. 무장이라야 보병총이 아니면 ‘토퉁’ 그리고 ‘연길 폭탄’뿐이었다. (중략) 알쌈(탄환)은 몇 개 안 남았지만 우리는 마음이 든든했다. 그것은 벌써 날이 저물고 있기 때문이며 날만 어두워지면 우리의 행동이 더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이 어둡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총알을 아껴 썼다. 놈들이 한참 총질할 때에도 우리는 바위틈에 의지하며 담배를 말아 피웠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 덮이자 초조했던 놈들은 최후 발악적으로 떼를 지어 기어 올라왔다. 우리는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고 기를 쓰며 올라오는 놈들에게 ‘연길 폭탄’으로 본때를 보여주었다. 골짜기에는 수많은 적의 시체가 너저분하게 깔려졌다. 이렇게 되자 놈들은 공격을 단념하고 어둠을 타서 구룡평 쪽으로 꽁무니를 빼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의란구 유격지를 소멸하려던 적들의 시도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는 이 전투에서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200여 명의 적을 소멸하였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국립출판사, 1964), pp.112-116.


5대 500의 전투에서 200명을 살상하고 최현 측에선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었던 전투. 의란구 근거지 방어 전투의 성과다. 과연 최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심한 과장이자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란구 전투가 실제 있었던 전투라면 그 결과가 과장됐을지라도 일본군 토벌대에 승리를 거둔 전투라고 봐 줄 수는 있겠다. 이보다 조금 현실적인 신빙성이 있는 전투가 1935년 5월 최현이 주도했던 ‘군용열차 습격전투’다. 이 전투에서 최현의 유격대는 일본군 장교들만 300여 명을 몰살시켰다고 한다. 당시 할바령을 통과하던 ‘경도선’은 일본의 만주 강점을 영구화하며 만주를 소련 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드는 데 중요한 동맥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일본은 수많은 병력과 군수 물자들을 이 경도선을 통하여 수송하고 있었다. 최현 부대가 노렸던 것은 경도선을 통하여 지나가는 일본 군용열차를 습격하여 적군을 살상하고 군수 물자를 탈취하는 것이었다.


“(중략) 나는 이미 1934년에 적들의 열차 습격전에 두 번이나 참가하였었는데 그때는 작전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한 관계로 두 번 다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는 전투를 앞두고 면밀한 준비를 하였다. (중략) 우리는 적 열차를 탈선시킨 후에 벌어질 이러저러한 정황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며 행동할 것인가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가 인솔한 우리 열차 습격대는 1935년 5월 어느 날 처창즈 유격 근거지를 출발하였다. (중략) 나는 한초 한초를 죄고 있다가 열차가 사격권 내에 들자 사격 명령을 내렸다. 우리 동무들이 일제 사격으로 불벼락을 안겼다. 순간 기관차는 궤도 밖으로 나뒹굴었다. 화통에서 쏟아지는 불씨가 확 피어올랐다. 바로 이때 우리 동무들은 때를 놓칠세라 일제히 달려들면서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순식간에 적 장교들만 300여 명을 몰살시켰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국립출판사, 1964), pp.150-152.
      
이렇게 볼 때 최현의 무장투쟁은 그 내용에 있어 다양했다. 일본군 토벌대와의 전투는 기본이었고, 무기 탈취, 지주 습격, 자위단 해체, 심지어는 열차 습격에 이르기까지 반일 또는 항일과 관계된 모든 행동이 실천적으로 이뤄졌던 것이다. 반면에 김일성의 항일 투쟁에는 사실 이렇다 할 가시적 성과가 없었다. 뒤에서 살펴볼 내용이지만 1933년 9월 김일성이 유격대 전투로는 처음 참가했다는 동녕현성 전투에서도 그는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보천보 전투가 발생하기 1년 전에 있었던 ‘캉달라 전투’에서 최현은 자신이 그때까지 자신이 경험했던 가장 큰 싸움을 겪었다고 한다. 최현에 따르면, 그는 이 전투에서 직접 1개 중대를 인솔하여 하루에도 수차례 전투를 진행하면서 길림 북쪽 노일령까지 적들을 유인해갔다. 본 부대와 추격대를 분리해 놓는 데 성공한 최현 부대는 1000여 명의 대부대로 구성된 적의 ‘월랭 부대’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줬다고 회고한다.


보천보 전투보다 석 달 앞서 있었던 ‘소탕하 전투’도 그가 경험한 대규모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고 기술된다. 이 전투에서 400명가량의 최현 부대는 1500여 명의 위만군 정예부대(정안군)을 무찌르고 경기관총과 보총 등의 군장비를 노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놈들의 시체가 산비탈을 한 벌 덮었다”는 등의 표현과 일본군 1500여 명을 삽시간에 쳐부쉈다는 내용 등을 볼 때 최현의 주장은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