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지난 1월 열린 제8차 노동당 대회에서 ‘이민위천(以民爲天)’을 선언한 이래, 북한 선전 매체들은 이와 관련한 김정은의 동정과 업적을 찬양하는 보도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먼저 관련 장면 몇 가지를 소개하고 그 속살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장면1 : 조선중앙TV는 지난 2월 1일 밤, 코로나19와 자연재해가 겹쳤던 지난해에 김정은의 활동상을 소개하는 ‘위민헌신의 2020년’이라는 제목의 새 기록영화를 약 1시간 30분 동안 방영했다.
영화는 “지나온 한 해 10년·20년 고생을 그 한 해에 다 겪으시며 사상 초유의 격란들을 헤쳐오신 원수님”이라며 지난해 코로나19와 장마·태풍 등 자연재해가 겹치며 유례없이 어려웠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 지난해 8∼9월 장마철 폭우에 이어 3개의 태풍이 연달아 닥쳐와 수해를 입자, 김정은이 현지 시찰과 각종 회의 개최를 통해 피해 복구 작업을 지휘한 과정을 자세히 나열하면서, 은파군 대청리 수해 당시 직접 해당 지역 군당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피해 복구를 지시한 일화를 공개했다.
또 김정은이 코로나19에 대응해서 비상방역사업 실태를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안정적인 방역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도 연이어 소집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지난해 7월 코로나19 감염이 의심되는 탈북민이 개성을 통해 재월북해 개성이 폐쇄됐을 당시 이 지역에 “전기와 석탄, 남새(채소) 보장문제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마음 쓰시며 각별한 정을 기울이셨다”고 김정은의 ‘애민정신’을 부각하기도 했다.
장면2 : 김정은은 제8기 제2차 당 전원회의(2.8~2.11)에서 “내각에서 작성한 올해 인민 경제 계획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데, 내각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은 채 성(省)에서 기안한 숫자를 기계적으로 종합하다 보니 어떤 계획은 현실 가능성도 없이 높이고 어떤 부문에서는 반드시 해야 할 것도 계획을 낮추는 폐단이 나타났다”고 책상을 치며 간부들을 질타했다.
특히 농업부문에서는 “어려운 상황에도 알곡 생산 목표를 주관적으로 높여, 관료주의와 허풍을 피할 수 없게 됐다”고 꼬집는 한편, 건설 부문에서 평양 살림집 건설 계획을 낮춘 것을 두고는 “보신과 패배주의의 씨앗”이라며 “올해 평양시에 1만 세대 살림집을 무조건 건설할 것”을 지시했다.
여기에 무사안일한 간부의 책임을 물어, 김정은은 지난 1월에 임명한 당 경제부장을 한 달 만에 경질(김두일→오수용 제2경제위원장)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내각과 경제현장 간부들은 탁상행정, 부문 간 협력 실패, 형식주의 등 그간 만연했던 문제점을 거론하며 노동신문의 ‘지상연단’이라는 코너에 릴레이식으로 자아비판을 하고 있다.
앞에 열거한 장면을 겉으로만 보면, 김정은이 인민경제를 향상시키기 위해 진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도건설위에 근무한다는 노동자는 “이 세상 그 어느 당 역사에 이런 실례가 있겠습니까, 평범한 인민을 하늘처럼 신성시하는 그런 당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는데, 노동신문을 비롯한 선전매체들은 이런 류(類)의 동원된 반응을 집중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장면을 한 꺼풀 벗겨내면, ‘이민위천’의 전혀 다른 속살이 드러난다. 첫째, 북한이 이번에 방영한 선전영화에 따르면, 김정은이 지난 1년 동안 북한 주민들을 위해 한 일이라고는 팬데믹에 대응한 방역 사업과 큰물 피해 복구 작업뿐이다. 이는 정상적인 국가라면, 정부가 당연히 취해야 할 책임과 의무이다. 하다못해 봉건시대의 임금조차도 흉년이 들면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한다는 의미에서 수라(水剌)의 반찬 수를 줄였다. 그런데도 이를 ‘위민헌신(爲民獻身)’의 표상이라고 내세운 것은, 북한이 얼마나 내세울 것 없고 어처구니없는 체제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둘째, 이미 지난해 홍수와 태풍 피해 복구사업에서 드러났지만,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재난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김정은의 지시나 명령이 없이는 어느 조직이나 개인도 자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경직된 사회라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각 개인의 창의성이 발휘될 소지가 없을뿐더러 절대권력자의 눈치를 살피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처세술이 되기 때문에 발전은커녕 ‘고여서 썩은 물’이 될 뿐이다. 다름아니라 지금 드러나고 있는 북한의 현실이다.
셋째, 김정은이 올해 인민경제개획과 관련 ‘보신주의와 패배주의’라고 경제 분야 간부를 질타한 것에 대해, 북한 선전매체들은 김정은의 이민위천 사상의 발로인 듯이 보도하고 있지만 이는 북한 주민을 호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 속담에 ‘상량부정 하량왜(上梁不正 下梁歪)’라는 말이 있다. ‘윗 들보가 바르지 않으면 아래 들보가 비뚤어진다’라는 뜻이다. 우리 말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와 똑같은 말이다. 따지고 보면, 작금의 어려운 북한 경제는 김일성으로부터 3대에 걸쳐 이른바 ‘백두 일가’가 80년 가까이 통치한 결과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한책임을 부하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이 내세우고 있는 ‘이민위천’은 그저 북한 주민을 기만하는 구호이자 또 다른 형태의 김비어천가(金飛御天歌)일 뿐이다. 북한이 최근 장마당의 국가 통제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은 이런 평가를 뒷받침하고 있다. 사실 북한의 ‘장마당 국가통제’는 지난 1월의 노동당 8차 당대회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당시 김정은은 사업총화 보고에서 “국영 상업을 발전시키고 급양, 편의봉사의 사회주의 성격을 살리는 것을 현 시기 매우 간절한 문제로 상정했다”고 발언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배급 통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장마당은 북한 당국이 공식 허가한 장마당만 500여 개, 종사 인원이 11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북한 인민경제의 핵심으로 발전했다. “노동당이 아니라 장마당이 우릴 먹여 살린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이런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안을 마련하지 않은 채 장마당을 당국의 통제에 두려는 시도는 ‘이민위천’이 그저 말뿐이라는 것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북한 당국이 진정으로 ‘이민위천’을 실천하려고 한다면 인민들 스스로가 擊壤歌(격양가)를 부르게 해야 한다. ‘땅을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라는 뜻의 격양가는, 공자가 태평성대의 이상으로 손꼽는 요(堯) 임금 시대에 불렸다는 민요다. 격양가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성군(聖君)으로 알려진 요 임금이 ‘백성들이 과연 잘 살고 있는가?’를 살피기 위해 변복을 하고 민정 시찰에 나섰다.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한 늙은이가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日出而作(일출이작) 해가 뜨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日入而息(일입이식)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쉬며
鑿井而飮(착정이음) 우물 파 목 마르지 않게 마시고
耕田而食(경전이식) 밭 갈아 음식을 배불리 먹으니
帝力於我何有哉?(제력어아하유재?) 황제가 내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 노래를 들은 요 임금은 ‘백성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 살고 있구나’라고 만족해서 돌아왔다고 한다. 격양가 설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진정한 이민위천은 인민들이 지도자를 의식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온갖 선전선동 매체를 동원해서 통치자의 위명(威名)을 알리고 연출된 충성심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이민위천이 아니다. 하늘이나 다름없는 백성은 섬김의 주체이지,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선택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객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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