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연구] CEO 김정일-1 ‘개혁과 반(反)개혁’

▲2001년 중국 방문 당시 김정일위원장 © 연합

2002년 4월 4일 평양을 방문한 임동원 특사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하 김정일)과 마주 앉았다. 김정일은 불쑥 동해선 철도 연결을 제의했다. 우리측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후속조치였던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에 신경을 쏟았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밖을 향해 “준비됐으면 들어오라고 해”라고 했다. 인민군 대장 이명수가 들어왔다. 커다란 지도가 들려 있었다. 각종 장애물까지 상세히 표시돼 있었다. 이명수는 북한 군부 사령탑의 한 사람으로 군사전략을 총 지휘하는 인민군 작전국장이다. 그가 군사지도를 펼쳐놓고 남북 철도 연결사업을 브리핑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남한 기업가들은 북한 사람들에게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그 효율적인 첩경을 잘 지도해줘야 한다. ” 2003년 6월 30일 개성공단 착공식 직후 고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이 공개한 김정일의 발언 한 대목이다. 김정일은 “개성공단은 미국의 도시계획이나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서슴지 않고 배워야 한다”고 했다. 정 회장이 개성공단에 논밭이 많아 지목변경이 필요하다고 하자 김정일은 “개성공단 잘 돼서 쌀을 사먹으면 되지”라고 했다.

김정일은 “사회주의 병폐는 거저 놀고 먹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 “사회주의 노동생활의 기풍을 확립해 건달을 부리거나 놀고 먹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다. 중앙방송, 노동신문 등에 이런 말들이 많이 등장했다.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는 이런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좁은 땅에서 2500만 인민을 먹여 살리려면 계획경제가 필요하지만 더 잘 살기 위해서는 경제개혁을 배워야 한다”는 김정일이 2002년 러시아 방문 길에 풀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지역 대통령 전권대표에게 한 말이다.

“우리는 기존관념에 사로잡혀 지난 시기의 낡고 뒤떨어진 것을 붙들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대담하게 없애버릴 것은 없애버리고…” “모든 문제를 새로운 관점, 새로운 높이에서 보고 풀어나가야…” 등의 김정일 발언도 2001년 1월 북한 노동신문에 소개됐다.

표현을 놓고 보면 옳은 말이다. 문제의 핵심을 짚은 것처럼 보인다. 실용적이고 유연한 사고도 엿보인다. 국내 언론은 김정일의 이런 말들이 나올 때마다 ‘신사고’로 보도했다.

이것이 김정일의 진짜 모습일까. 노동신문은 김정일의 ‘현상유지적’ 모습도 함께 실었다. 김정일은 주민들의 삶이 어려웠던 90년대 “인민생활에 필요한 일부 소비품을 다른 나라에서 사다 쓰자는 것은 자본주의적 경제관리방법을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경제사정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1997년 말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중앙당 간부가 김정일의 지시로 보고서를 냈다. 전국의 공장•기업소를 방문해 실태를 파악한 내용이다. 대안은 세 가지로 요약돼 있다. 첫째 경제회생을 위해 돈이 필요하며 그 재원은 관광업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98년 11월 시작한 금강산 관광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외국투자를 장려하고 일부 경제개방을 하자는 것, 셋째는 시급한 전력문제를 풀기 위해 대규모 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정일은 “우리나라에 조성된 정세는 관광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나라를 개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둘째에 대해서도 “외국투자와 외자도입은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문제”라고 했다.

김정일은 당 중앙위원회 간부들과 가진 담화(대화)에서는 개혁•개방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과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개혁•개방은 망국의 길입니다. 우리는 개혁•개방을 추호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김정일선집 제14권•2000년 발간) “개혁•개방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단호하고 명백합니다. …누가 무어라고 하든, 어떤 바람이 불어오든 우리 당과 인민은 결코 개혁•개방의 길로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조국 2004.12 발간)

북한 경제개혁의 상징적 조치로 주목받고 있는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역시 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멀다. 재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사회주의 원칙을 기초로 해서 단행된 조치”라고 밝혔다. 중앙통제적 계획경제의 틀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7•1 조치의 연장선상에서 북한 각지의 농민시장이 지역시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데 대한 평가도 흥미롭다. “일부 자본주의 나라 사람들은… 마치도 우리 공화국이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에로 정책전환’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현실을 오도하고 있다. ”(조국 2004.11) 이런 시각에서 “김정일은 서구식 개방을 원치 않는다. 북한식 전통을 유지하는 데 해롭지 않은 개방을 할 것이다”라는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의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2000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김정일을 두 차례 만났다.

김정일이 변화를 추구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변화를 거부하는 듯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북한경제가 당면한 문제의 본질과 해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김정일이다. 동시에 전 세계에 유례없는 유일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부담도 안고 있다. 북한 주민의 삶을 생각하는 개혁•개방의 길은 체제 붕괴를 재촉할 수도 있다. 북한 내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이지만, 이러한 그의 폭넓은 선택지가 도리어 더딘 변화의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출처:nkchosun.com

조동호 한국개발연구원 기획조정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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