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이산상봉 정례화 방안 필요…화상상봉도 진행해야”

▶전날 북한 주민들이 청취한 대북 라디오 방송 중 주요 내용을 소개합니다.

<자유조선방송/2월 21일>

논평-더 자주 만날 수 있게 해야 한다.

남북으로 헤어져 수십 년을 살아왔던 혈육들이 어제 금강산에서 감격스러운 상봉을 했습니다. 예년보다 금강산에 많은 눈이 내렸지만, 이들의 만남을 가로막진 못했습니다. 마침내 만나 서로 껴안고 얼굴을 비비며 뜨거운 눈물을 쏟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남한 인민들도 함께 웃으며 울었습니다. 특히 심한 감기를 앓고 있는 아흔한 살의 김섬경 할아버지는 죽더라도 금강산에서 죽겠다며 이동식 침대에 누운 채 실려와 북한에서 온 딸과 아들을 만났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이산가족들의 만남이 얼마나 시급한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번에 상봉한 이산가족들은 그나마 세상을 뜨기 전에 피붙이를 만나 조금이라도 그 한을 풀 수 있었지만, 아직 생사확인조차 되지 않은 상봉 신청자들이 대부분입니다. 현재처럼 이렇게 가물에 콩 나듯 찔끔찔끔 그것도 마치 큰 선심이나 쓰는 듯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또는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때마다 상봉 행사를 허가한다면 수백 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럼 이산가족들은 피맺힌 한을 그대로 안고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해마다 6천 명씩 만나도 10년이 걸린다니 그럼 이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사회제도와 이념이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로 수많은 이산가족이 장기간 동안 만나지도 못하고 생사 확인조차 못 한 채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세계 그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산가족 상봉을 정례화하고 더 자주 만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하고 자유롭게 편지라도 주고받게 해야 합니다. 상봉 행사를 할 때는 나이 많은 분들이 먼저 만나도록 우선권을 주고, 필요하다면 화상상봉도 해야 합니다.

더 이상 김정은 정권은 이산가족상봉을 자기의 정치적 도구로 써먹으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이번에도 통 크게 양보했다고 하면서 마치도 큰 혜택이라도 베푼 것처럼 했는데 이산가족상봉은 남한에만 혜택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이번 상봉 행사를 보면서 하루하루가 아깝고 시급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김정은 정권은 더 이상 이산가족들의 인륜과 천륜을 거역하는 죄를 짓지 말고 이들이 더 자주 만날 수 있도록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개혁방송/2월 23일>

북한인권특강-이산가족들의 인권 1

북조선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에는 남북으로 흩어진 이산가족들의 인도적 고통과 인권문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며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1천만 이산가족’을 말합니다. 남과 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의 수가 1천만 명이나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많은 이산가족이 광복된 지 68년, 6·25 동족상잔 전쟁이 멎은 지도 60년이 지나도록, 그러니까 두 세대가 지나도록 인도적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지요. 그러한 사례는 인류 역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일입니다.

남북 이산가족이란 가족과 헤어져서 남북 지역에 분리된 상태로 거주하고 있는 8촌 이내의 친·인척과 배우자 또는 배우자였던 사람을 말합니다. 이산가족은 1945년 9월 2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일반명령 제1호로 북위 38도선이 그어지고, 당시의 소련과 미국이 이를 경계로 군대를 진주시키면서 발생하기 시작했고, 6·25전쟁의 결과 1953년 7월 군사분계선이 설정됨으로써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산의 역사가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은 사회생활의 기초 단위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모여 사는 것이 상례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핵가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족이 분화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 역시 숙식을 따로 할 뿐, 필요할 때마다 만날 수 있고 또 함께 지낼 수도 있기 때문에 이산가족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또 가족의 일부가 멀리 떨어진 곳에 살거나 외국에 나가 산다고 해도 요즈음 세상에서는 필요할 때 언제나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고, 왕래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누구나 화상통화까지 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남북으로 흩어진 이산가족들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고,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생사조차 모르는 채 반세기 이상의 세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도 그것마저 들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 겨레는 원래 한겨레입니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겨 고통받던 시기에도 가족들이 지금처럼 흩어지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때도 멀리 흩어진 경우가 많았지만 서로 안부는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남북 이산가족들은 지척에 가족을 두고도 만남은 고사하고 생사조차 모르고 지내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우리 겨레가 이와 같은 비극에 처하게 된 것은 첫째로 남북이 분단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6·25라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며, 셋째로는 북조선 측이 문을 열지 않고 폐쇄체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단과 전쟁이 지난 지 이미 두 세대가 지난 지금도 생사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은 그 원인이 분단과 전란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북조선 사회가 개방사회라면 이산가족들의 생사확인쯤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국 사람이 남조선에 사는 친구를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지난 1945년 광복과 동시에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특히 북조선에서 소련식 혁명이 급속히 진행되자 북쪽에서 많은 사람이 남녘으로 옮겨갔고, 또 6·25전쟁 때 역시 많은 이동이 있었는데 북조선 측이 남에서 북으로 데려간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북에서 남으로 이동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이산가족이 헤어질 당시에는 이산 상태가 수십 년이나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흘 또는 일주일만 옮겼다가 돌아오리라 마음먹었고 길어야 몇 달 정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헤어진 가족과 친족이 대체로 한쪽에 500만 명, 그래서 양쪽 합하면 1천만 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겨레의 인구를 남쪽 5천여만 명과 북쪽 2천 4백만 명, 그리고 해외 동포 700여만 명을 합친 8천여만 명이라 할 때 약 여덟 명 가운데 한 사람은 이산가족인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인구가 그 오랜 세월 동안이나 그리운 가족을 만날 수 없고 소식을 전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생사조차 모르고 사는 오늘의 우리 겨레 현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어느 면에서는 민족적 수치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도적 고통을 풀어나가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벌써 40년이 지났습니다만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제의로 시작된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회담’이 그 노력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추진된 남북 당국 간 여러 회담에서도 이산가족들의 인도적 고통을 해소하는 일은 최우선적인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1천만 이산가족 찾기’ 과제를 풀기 위한 남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아직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 이어서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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