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그리고 ‘내 마음의 풍금’

함께 압록강을 건너왔던 아들과 헤어진 후 저는 2달간 중국의 농촌을 떠돌았습니다. 조선족 동포들의 집을 발견하면 염치 불구하고 거기서 몇 끼니씩 얻어먹으며 정처 없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처음으로 만난 교회가 A교회였습니다. A교회는 한국에서 오신 마음씨 좋은 집사님께서 관리하고 계셨는데, 오갈 곳 없는 저에게 생활할 곳을 만들어주시고 참다운 신앙의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한국 집사님 도움으로 교회 정착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생활하며 주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꿈같던 시간도 잠시, 반 년만에 A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늘 집사님과 성도들의 보살핌만을 받아왔던 저는 너무나 고맙고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겨울철이 되자 저는 주일 아침에 예배를 위해 난로불을 맡겠다고 자진했습니다. 목사님과 성도들이 말렸지만 저는 혼자 몸이니까 가정의 부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먹고, 자고, 입는 것을 신세지는 것이 양심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교회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까 하는 자격지심 때문에 육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늘 자진해 나서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리수희
1931년 자강도 출생
1996년 탈북
현재 중국 長春에 거주

주일 아침예배가 있는 날이면 컴컴한 새벽 6시에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날 아침은 눈이 많이 와서 눈길을 헤치고 교회에 들어가서 난로불을 피우고 연기도 뽑고 간단히 청소도 했습니다. 그날은 한국에서 목사님 한 분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각별한 마음을 갖고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성전 위의 십자가에 거미줄과 먼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꼭 내가 십자가를 더럽힌 것 같아서 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둘러봐도 걸레가 없길래 부엌의 행주를 가져다가 십자가를 깨끗이 성의껏 잘 닦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집사님 한 분이 행주로 십자가를 닦는 저를 보시고는 큰 소리로 노발대발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부엌 행주로 십자가를 닦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누가 맘대로 그 강대상(목사가 예배를 주관하는 연단)에 올라가라고 했습니까?”

그때 나는 내 머리 위에 대형 폭탄이라도 터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저 가슴만 울렁거리며 내가 큰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에 손에 들고 있던 행주를 얼른 빨기 위해 부엌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따라 오시더니 “당장 밖에 가서 빨아요” 하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저는 얼른 빨래 그릇을 들고 바깥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날 아침에 밖에서 찬물에 그 행주를 빨려고 하니 손끝이 얼어오고 행주는 얼어서 물에 헹굴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서러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혹 다른 성도들이 볼까봐 얼른 변소에 가서 한참 동안 눈물을 참아야 했습니다. 만약 그때 나 혼자 어디론가 자유롭게 갈 수만 있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실컷 울다 오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럭저럭 그날 하루 예배가 다 끝나고 저는 조용한 틈을 타서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그럼요, 무슨 일이십니까?”
“성전 강대상에 청소하러 올라가면 안됩니까?”
“그런 것을 왜 물으십니까?”
“그저 저는 교회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든 것이 다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강대상은 주님을 뵙는 장소이지, 주님께서 계시는 곳은 아닙니다. 깨끗이 청소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야 마음이 풀리고 가벼워졌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저는 교회 일에 절대로 앞장서서 나서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교회의 풍금 반주자가 되어

A교회에는 풍금이 있었는데 마땅한 반주자가 없어서 예배 때마다 반주 없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시간에 제가 너무 일찍 나가서 혼자서 교회에 앉아있게 되었습니다. 성전 구석에 놓여있는 풍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녀시절 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며 풍금을 타던 생각이 나서 잠깐 풍금에 올라 앉아 보았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시간이 퍽이나 지났는지 풍금 타는 것을 성도들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왜 풍금을 잘 타시면서 지금까지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성도들이 모두 놀라 야단 법석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주일예배 시간에 풍금을 타기 시작했고 주일예배 시간의 분위기도 달라졌습니다. 세례까지 받고 나자 진정으로 주님의 딸이 되었다는 영예와 긍지감도 생기고 교회생활에 자신감도 커졌습니다. 그전 같으면 주일 예배시간에도 제일 뒷자리에 앉아서 ‘우리 아들이 어디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지는 않았을까’ ‘누가 나를 고발하지는 않을까’라는 부질없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집에 돌아가서야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마쳤구나’ 하고 안심하는 데 만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나는 주일예배의 구경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나의 풍금 반주에 맞추어 성도들이 신나게 부르는 찬송 소리에 내자신도 흥겹고 즐거웠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신앙생활도 정차 성숙되어 가고 마음속으로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기쁘고 좋았으나 이런 행복한 생활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족 집사님과의 갈등

본래 A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집사님께서 한국으로 돌아가시면서 조선족 여자 집사님께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이유 없이 저를 박대했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집사님이 떠나자, 갑자기 제가 행주로 십자가를 닦았던 일을 다시 들먹이며 저를 교회의 웃음꺼리, 비방꺼리로 앞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성도들에게 “저 조선 아주머니는 교회 책임자인 나는 배척하고 다른 집사님들에게만 고분고분하다”며 비판을 가했습니다.

물론 그녀는 대중 앞에 나서서 교회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저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 일이며 시비 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내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자기보다 나은 것 같고 많이 배운 것 같아서 질투하는 것인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북한에서 평생 월남자(越南者)의 딸이라는 이유로 무수한 차별과 냉대를 받아왔던 저는 그녀의 태도가 못 마땅 했습니다. 주위의 친한 성도들이 그녀에게 한번 찾아가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고 충고도 해주었지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조선을 떠난 것도 저런 이유 없는 박해와 차별 때문인데, 무엇 때문에 남의 나라에 와서까지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금요기도회가 있던 어느 날, 저는 평소와 같이 앞자리에 나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족 여자 집사님이 저에게 “앞으로 앞에 앉지 말고 뒤에 앉아요. 풍금반주도 그만 하세요” 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자리에 모여있던 성도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저 자매님이 무슨 잘못을 하셨길래 저렇게 야박하게 말하는가?” 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시키는대로 제일 뒷자리로 가서 앉았습니다. 뒷자리에 앉고 보니 그 자리도 괜찮았습니다. 저는 늘 풍금 반주만 했기 때문에 찬송가의 곡만 알았지, 가사내용은 잘 몰랐는데 뒷자리에 앉아 찬송가를 부르는데 열중해보니 찬송내용도 은혜 되고 기쁜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찬송가 395장 ‘너 시험을 당해’는 부르고 불러도 자꾸만 부르고 싶은 저의 찬송가였습니다.

교회를 떠나…

일주일 후 주일예배 시간에 교회 대문을 들어서는데 여자 집사님이 싸늘한 눈초리로 저를 보며 한국에서 온 목사님에게 무언가 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니 저는 도저히 가슴이 쿵쿵거리고 불안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대문 밖으로 나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교회에 들어가는 자매님들이 “왜 밖으로 나와요? 예배시간 다 되었는데? 어서 들어갑시다” 하며 손을 잡아 끌자 할 수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마냥 자매님들의 뒤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 집사님이 앉으라는 맨 뒷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재판장 앞에 끌려온 죄수가 된 기분에 무슨 말로 기도를 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믿음이 약하고 늘 신변상의 불안감이 컸기 때문에 자신감이 없고 흔들릴 때가 많았습니다.

‘내가 여기에 왜 앉아 있는가’ 하는 생각부터 ‘집사님이란 분이 이토록 나를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생각까지 그저 시간 가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억울하고 서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족 여자 집사님이 너무나 미웠습니다. 제 나라도 없이 떠 돌아다니며 괄시받는 제 신세가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결국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A교회를 떠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삿짐을 싸서 남의 집 창고에 맡기고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믿음이 가는 전도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전도사님은 제가 찾아온 사연을 다 듣고 난 뒤, 지금 그 집사님의 태도로 봐서는 도리어 자매님이 어려울 수 있다고 걱정하며, 다른 교회의 목사님을 소개해 드릴 터이니 그곳으로 찾아가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제가 지금 머물고 있는 장춘(長春) 변두리의 작은 교회입니다.

4년 만에 다시 찾은 A교회

재작년 여름 저는 A교회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래도 낯 설고 물 설은 중국 땅에 와서 처음으로 배불리 먹으며 주님의 은혜를 받았던 곳이기에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A교회에 들어서니 그 동네 아주머니들이 저를 보고 “어디 갔다가 이제 나타났는가? 북한으로 잡혀간 줄 알고 걱정했다”며 손을 붙들고 반가워 했습니다.

4년 만에 다시 만난 이웃들은 그 동안 A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행주로 십자가를 닦았다고 야단쳤던 집사님은 2년 전에 뇌출혈이 생겨 자식들이 대소변을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A교회 근방에 살고 있다는 그 집사님을 찾아가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하고 인사를 건네니 말씀은 못하시고 고개만 끄떡거리셨습니다.

조선족 여자 집사님은 더욱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의 동생집에 살고 있었는데 추운 겨울 빙판 길에 미끄러져 머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큰 병원에서 머리 수술까지 받았지만 후유증이 심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녀를 찾아갔을 때 나를 보자 마자 함박 웃음을 짓긴 했지만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잘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기억력도 가물가물해져서 밖에 혼자 내보낼 수 없다고 동생분은 말했습니다. 환갑도 되기 전에 이렇게 불구자가 된 것이 너무나 불쌍하고, 그녀를 원망하며 살았던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A교회에 도착한 지 이튿날이 마침 주일이었습니다. 정식 주일예배가 다 끝나자 성도님들이 함께 복음성가를 연습하자며 간절히 요구했습니다. 오랜만에 풍금소리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는 성도들은 시간이 늦도록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제가 떠난 후 처음으로 A교회에 풍금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명하신 길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옹졸하게 다른 사람들을 질투하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원망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지었던 죄를 씻기 위해 오늘도 주님께 간절히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