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모는 송환 후에도 金부자에 충성다짐했을까?






▲ 2008년 7월에 평양시내에 건립된 이인모 씨의 동상 ⓒ연합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씨가 북한에 송환된 지 19일로 17년째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인도주의에 기초해 이 씨를 ‘장기방북’ 형식으로 송환했다.


북한에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1호였던 이 씨는 인민군 포로 출신이다.  


이 씨의 검거 당시 재판기록에 따르면 그는 경상남도 내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의용군에 강제 모집돼 전선에 투입되고, 이후 1950년 9·28 서울수복 후에는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있다.


북한은 이 씨가 해방 후 노동당에 입당하면서 공산주의 활동에 뛰어들었고, 50년 한국전쟁이 발발, 인민군 문화부 소속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본대와 연락이 끊기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 이 씨는 지난 1952년 빨치산 토벌대에 의해 검거돼 7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1959년 출소했다. 그는 1961년 6월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혐의로 붙잡혀 15년형을 선고받아 실형을 살고도 두 차례나 더 복역하는 등 총 34년간 옥살이를 한 뒤 88년 석방됐다.


이 씨가 북으로 송환되게 된 계기는 지난 1989년 그가 ‘월간 말’에 북한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수기를 연재하면서 부터다. 1991년 제5차 고위급회담 때 서울에 온 북측 기자가 이 씨 부인의 답장을 남측 보도진에 전달하면서 가족의 생사가 확인됐다.


이후 이 씨는 가족을 그리며 북한행(行)을 고집했고, 북한도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 사업의 전제로 이 씨의 송환을 요구했다. 결국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인 3월 19일 ‘인도주의’라는 명분으로 북송이 전격 진행됐다. 


송환 직후부터 이 씨는 북한 당국의 체제 선전 도구로 활용됐다. 북한은 이 씨를 ‘의지와 신념의 화신’, ‘통일의 영웅’ 등으로 선전하며 대대적인 환영과 함께 극진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이 씨를 소재로 한 우편엽서와 우표까지 발행했다.


‘김일성훈장’과 ‘영웅칭호’, ‘국기훈장 1급’이 수여됐고, 고위간부들이 이용한다는 봉화진료소에서 진료를 받고 이례적으로 신병 치료차 미국에도 다녀오는 등 북한 당국의 극진한 대접은 끊이지 않았다.


이 씨를 소재로 한 영화와 가요도 제작됐고, 그의 모교인 파발인민학교(현재 량강도 김형직군 소재)는 ‘리인모인민학교’로 개명되는 북한 당국의 파격적인 조치는 이어졌다.


그러나 이같은 북한 정권의 융숭한 대접은 이 씨의 언행 한 마디에 중단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 씨가 북한의 교화소를 둘러보고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는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진 후 그를 활용한 모든 선전활동이 중단됐고 이후 그는 사회와 고립돼 외롭게 연명하다 2007년 6월 생을 마쳤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 공식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가 죽은 후 2008년 평양 통일거리에는 이인모의 동상이 건립됐다. 이 씨는 청년기 이후를 북한에 충성한 삶을 살았지만 그가 돌아간 북한이 수령독재사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고뇌를 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