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매료된 대학시절

김정일은 60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김일성의 자녀들은 모두 김일성 종합대를 졸업했다.

60년대 대학을 다닌 남한의 학생들은 ‘4.19 세대’로 불린다. 이 시기 북한 대학생들은 ‘천리마 세대’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이 내놓은 경제개발 6개년 계획하에 전국적인 ‘천리마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리마운동은 경제재건을 위한 대중동원운동이었다. 당시 북한의 대학생은 학습과 현장실습, 군사야영훈련이 대학생활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은 대학시절 특별대우를 받았다. 학생들도 ‘김정일’로 부르지 않고 ‘수상님 자제분’으로 불렀다. 대학생활과 동시에 활동영역이 넓어졌고, 이에 따라 김정일을 따라 붙는 호위국 요원들도 늘어났다. 김정일의 대학생활 전반을 ‘관리’한 사람은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인 김신숙이었다. 김신숙은 김일성의 고종누이이자,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부인이다. 또 정치, 경제, 역사, 철학, 어학 등 주요과목별로 개인교사들이 김정일에게 한명씩 배정됐다. 김정일의 ‘가정교사’들은 대체로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인 강좌장들이었다.

북한의 대학 강좌장은 남한의 대학에서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맡는 ‘학과장’과는 다르다. 강좌장은 해당분야 최고의 실력자만이 맡게 된다. 김정일 전기 등에서 김정일이 대학시절 썼다는 논문들은 대체로 이들 개인교사들이 내준 과제물을 후에 다시 정리한 것들이다.

김정일의 졸업논문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군(郡)의 위치와 역할>이다. 내용은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없애고 농촌을 도시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서 군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에 대한 것이다. 김정일 전기들은 이 논문을 대학졸업논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새로운 이론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김정일이 한달 남짓한 기간에 집필했다는 이 논문의 숨은 저자는 그의 지도교수인 경제학박사 전용식으로 알려진다.

전용식은 후일 북한 학계의 최고 영예인 사회과학원 ‘원사’(院士)가 된다. ‘원사’는 나라의 학문발전에 가장 크게 공헌한 인물에게만 주는 최고의 명예칭호다.
전용식은 서울에서 대학교편을 잡다가 월북한 ‘남반부 출신’이었다. 전용식은 78년경 남한 출신 교수들을 대학에서 대거 내쫓을 때에도 김일성종합대학에 그대로 남았다.

대학시절 김정일의 관심을 가장 끈 것은 ‘영화’였다. 그는 매일 중앙영화보급사로 ‘등교’하다시피 했다. 나중에 중앙영화보급사는 김정일을 위해 특별 영사실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

김정일이 영화에 빠진 것은 영화 속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영화는 보잘 것 없었다. 영화제작의 설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볼만한 영화라곤 소련영화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소련영화를 빠짐없이 보기 시작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서방세계의 지식과 정보도 얻었다.

현재 평양에는 김정일 개인을 위한 필름 라이브러리(영화문헌고)가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는 1만5천여편에 이르는 각국 영화필름이 소장돼 있다. 직원으로는 성우, 번역사, 자막사, 녹음기사 등 2백50명이 일하고 있다. 남한영화 필름도 3백여편을 따로 챙겨 ‘남조선실’에 보관하고 있다. 신상옥-최은희씨의 증언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원본이 상실된 필름도 있다고 한다.

70년대 남한의 영화진흥공사가 홍콩을 통해 남한영화를 싼값으로 동남아에 수출한 적이 있었다. 이때 김정일이 그 필림들을 몽땅 자신의 수중에 넣었던 것이다.

이 필름 라이브러리 관리인은 해외에 나가 필름을 수집하여 외교행랑에 담아오는 것이 주업무다. 서방영화를 들여오는 창구는 모스크바였다. 96년 2월 성혜림 서방탈출사건이 보도되기 전까지는 모스크바에 있던 최준덕이 이 일을 맡았다. 최준덕은 김정일과 김일성종합대 동기다.

모스크바에서 외국영화를 들여오는 것을 ‘백호(No. 100) 물자사업’이라고 한다. 김정일이 직접 지은 암호명이다. ‘백호물자 사업’에는 외국영화 수입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중국의 광주(廣州), 마카오 등지의 북한 대사관에서 전문 카피기계를 차려놓고 필름을 복사하여 평양에 들여보내는 일도 포함돼 있다. 이 ‘사업’은 70년대 초 이종목 외교부 제1부부장이 총괄했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남조선’ 영화, 액션물, 애로물, 중국 무술영화, 일본 닌자물 등 전 세계의 영화가 모두 이 ‘사업’을 통해 평양에 전달된다.

The DailyNK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