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 `對北 압박메시지’ 배경과 의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독일 국빈방문 첫날인 11일 새벽(이하 현지시간) 전례없이 강한 톤으로 북한을 압박하는 메시지를 던졌다.

독도 영유권 분쟁과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를 둘러싼 한일간 첨예한 갈등를 감안할 때 독일의 과거사 진상 규명 및 배상 노력을 대비시켜 ‘대일(對日) 강경발언을 쏟아낼 것이라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노 대통령이 대내외적으로 극히 민감한 시점에서 이 같은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굳이 북한을 겨냥해 쓴소리를 한 배경은 뭘까.

더욱이 독일은 지난 2000년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을 통해 과감한 대북 지원의사를 밝혔고, 그후 남북정상회담을 전격적으로 성사시킨 ‘역사적인’ 곳이다.

물론 이날 베를린 동포들과의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이 “남북관계가 제일 큰 문제고, 그 다음이 동북아 평화구조”라는 발언을 곱씹어보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이렇게 쓴소리를 하게 된 배경에는 노 대통령이 자임해온 북핵문제와 관련한 우리의 주도적 역할의 차질, 동북아 질서재편 구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시각이 엄존한다.

지난해 말 북핵문제에 대한 한국의 주도권 행사를 놓고 미국 등 당사국의 이해를 얻어냈으나, 북한의 대화 거부로 ‘주도권 행사’는 차치하고 6자회담조차 열리지 않고 있는 상황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 아니냐는 것이다.

아울러 노 대통령이 지난 3월 동북아 질서재편을 겨냥해 선언한 이른바 ‘동북아 균형자론’이 실행에 옮겨지려면 궁극적으로 북한의 태도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아래 북한의 태도변화를 촉구하게 된 것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다.

◇대북 메시지 어떤 내용 담았나 노 대통령은 연설에서 “(남북)정상회담, 평화선언도 하고 싶지만 서로의 대화의 원칙, 일반적 원칙을 지키면서 해야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족의 미래를 생각해 남북관계를 크게 진전시키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북한이 상식과 신의를 지키지 않는 한 당분간 성사되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주지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노 대통령은 남북간 비핵화 약속과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김정일(金正日) 위원장의 답방약속 불이행 등을 꼬집으면서 북한에 대해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 복귀를 우회적으로 촉구했다.

특히 한반도 비핵화 합의와 관련, “대외적으로 북한이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합의를 했으면 지켜야 하는데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고, 북핵문제에 있어서도 “북한은 우리 정부를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강도높은 대북 비판이다.

이른바 일본에 대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요구했다면, 북한에게는 ’대화의 일반칙 원칙’을 촉구한 셈이다.

아닌게 아니라 노 대통령이 남북관계를 건축에 비유하며 “1층 짓고 그위에 2, 3층 지어야지 한꺼번에 7, 8층 올릴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은 남북관계에 있어 신뢰 구축이 제1의 요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을 향해 6자회담은 물론 비료 지원 문제를 거론하며 남북간 공식대화 창구 복귀를 촉구한 것은 상호 존중의 원칙하에 “지킬 것은 지키자”는 논리로 받아들여진다.

◇대북 정책기조 변화오나 = 노 대통령은 “남북 관계에서도 쓴소리를 하고 얼굴 붉힐 때는 붉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독일의 통일 과정을 보면 남북간에 갈길이 멀고 거칠 과정도 많은데 남북관계도 상호 존중하고 약속을 지키는데서 이뤄져야지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대로 한쪽이 끌려가는 상황이 돼선 안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북한의 태도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자 “더 이상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해석된다.

그간 혈맹관계인 미국과 날카로운 대립각까지 세우며 북한을 은근히 두둔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왔던 점을 감안하면 전술적인 변화 가능성마저 시사하는 대목이다.

지난해 11월 남미 3개국 순방길에 나왔던 ‘LA 발언’이 미국의 보수파를 겨냥했다면 이번 베를린에서의 첫 메시지는 대화에 소극적인 북한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특히 대북 비료지원 문제와 관련 “공식 대화 창구에 나와서 지원 요청하는 게 도리”라며 “서로 지킬 것은 지키고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데서도 노 대통령의 이런 의지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노 대통령의 독일 방문을 수행중인 정부 핵심당국자는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노 대통령의 발언 배경에 대해 “그간 남북관계의 진전을 기대해 왔는데 북한이 대화에 응하지 않음에 따라 좀더 이 상황을 바꿀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이같은 강도높은 발언에도 불구, 참여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에 일대 수정이 이뤄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김만수(金晩洙) 청와대 대변인도 “(남북간) 대화에 어떠한 옵션이나 조건을 다는 것은 아니다”면서 “따라서 대북 정책기조의 변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6자회담에의 조속한 복귀와 대화를 거듭 촉구한 강력한 메시지일 뿐 대북 강경쪽으로 대북 정책을 선회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대통령 발언 숨은 배경있나.

노 대통령의 이날 간담회 발언의 핵심은 결국 김정일 위원장이 전략적 결단을 하고 나오지 않고서는 지난해 7월께부터 중단되고 있는 남북관계 개선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 북한의 결단을 촉구한 것이라는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이런 발언의 이면에는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는 국제적인 환경변화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6자회담을 계속 거부하고 있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인내가 한계점에 이르고 있고, 미국이 동북아에서의 패권 유지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 중국과 날을 세우고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과 일본 조야 일각에서는 ‘6자회담 6월 시한설’ ‘북핵 6월 위기설’ 등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노 대통령은 이런 점들을 두루 감안해 북한에 대해 다시한번 결단을 촉구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최근들어 상대적으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자주 거론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게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어 주목된다./베를린=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