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그 끔찍한 국경초소 구타

탈북여성 구타 사진이 26일 최초공개된 후 네티즌들의 반향이 김정일 독재와 북한군인들에 대한 분노로 끓고있다.

뉴스를 접한 많은 사람들은 그간 말로만 접했던 북한인권이 논의여지조차 없이 열악한 상황이라는 점에 분노를 금치 못한다.

많은 방북단체들이 북한을 다녀와 “북한이 변하고 있다” “북한인권이 일부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주 열악한 수준은 아니다”며 탈북자들의 증언에 대해 “왜곡 날조”라는 딱지도 서슴지 않았다.

일부 친북좌파들은 북한의 인권에 입다물고 김정일 정권과 동침(同寢)하기 위해 갖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지난 3월에 보도된 공개총살 동영상을 놓고 “남북관계에 초를 치는 행위”라며 심지어 “탈북자들의 말은 들어볼 가치가 없다”고 일축해왔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이번에는 또 뭐라고 하겠는가

같은 동족끼리, 그것도 나라를 지켜달라고 군량미를 꼬박꼬박 바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발길질을 하고 몽둥이로 때리는가 하는 것이다. 때리는 군대에게는 부모도 형제도 없는가? 굶주려 중국에 가서 밥이라도 먹어보겠다고 가는 동족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머리칼 냄새 맡으며 “우선 족쳐”

내가 북한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2000년 6월, 나는 9일 동안의 힘든 노정을 거쳐 평양에서 회령까지 도착했다. 막상 회령에 도착해 중국으로 가자고 했지만 안내자도 없고, 루트도 정확치 않아 한동안 헤맸다.

때는 11시경, 나는 회령시내를 벗어나 회령-삼봉을 연결하는 도로상에 올라섰다. 북쪽으로는 두만강이 있었고, 어느 쪽에 초소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도로를 따라 약 1천 미터를 걸었는데, 앞에 보위부 10호 초소가 나타났다. “아차!” 싶었다. 잽싸게 돌아서서 몇 걸음 걷는데, 불쑥 군인 세 명이 나타났다. 한 명은 상위(중위) 계급을 단 장교였고, 두 명은 중사, 하사의 계급을 단 사병들이었다.

“누구야 섯!”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전기라이터 불이 내 얼굴을 비쳤다. “야, 너 어디 살아?”라고 묻는다. 나는 “인계리에 사는데, 회령에 사는 삼촌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굳어진 나의 평양 사투리를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인계리? 근데 왜 말씨가 달라?”라고 묻는다. 함경도에는 평양사람들이 없어 금방 탈출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다음 순간, 눈앞이 번쩍하며 둔중한 물건이 내 머리를 내리쳤다. 나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는 순간 사병들은 총탁(개머리판)으로 까고 발로 올려 차며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았다. 매로 다스리는 것은 국경경비대의 상투적인 심문방법이다. 맞는 방법밖에 없었다. 만약 반항하는 날에는 초소로 끌려가 탈출이라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머저리인체 하며 맞을 수밖에 없다.

“야, 이 새끼야, 폐 내놔!” 고 한다. “폐가 뭔데요?” 폐는 국경경비대들만 통하는 중국 돈(인민폐)다. 나는 중국에는 간 적도 없고, 회령 삼촌집에 간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병 둘은 나를 가운데에 세우고 머리칼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다음은 겨드랑이, 팬티 등에서 향 비누냄새(북한에는 비누에 향이 없다)라도 나면 중국에 갔다 왔다는 물증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내 짐을 다 풀어 헤쳐봐야 중국 물건이라곤 하나도 없고, 향냄새도 나지 않자 장교가 “이 새끼, 보위부에 넘겨!”라고 사병들에게 지시한다. 절대로 보위부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내 짐속에는 담배와 빵과 같은 물건들이 좀 있었다(중국에서 헤맬 것을 타산해 먹을 것을 준비했다).

도덕적으로 이미 타락한 그들은 막무가내로 내 짐을 빼앗고 풀어주었다. 훗날 나는 그 짐이 상당한 고마웠다. 그 짐이 없었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보위부에 끌려갔고, 탈출이 늦어졌는지도 모른다.

“통일 되기 전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짐 빼앗기고, 매까지 맞으니, 울분과 증오가 치밀어 올랐다. 남의 땅도 아니고 제 땅에서 밤에 다닌다는 이유 하나로 매를 맞다니, 눈은 퉁퉁 붓고, 총탁에 맞은 어깨는 쑤셔왔다. 나는 도무지 그 날밤을 그 땅에서 보낼 것 같지 않았다.

새벽 2시, 드디어 나는 배밀이(낮은 포복)로 두만강 가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마지막 한걸음이면 조국이 아닌 이국 땅이다. 그러나 침을 뱉었다. 고향이지만 매정하고 사람 못살 지옥같이 느껴졌다. 고향 쪽을 향해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기도를 하고, “통일이 되기 전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두만강을 건넜다.

북한군대들이 저 지경까지 된 데는 김정일 정권 때문이다. 배고파 두만강을 넘는 사람들을 ‘반역자’라는 감투를 씌우고 국경을 봉쇄하고 극심한 증오심을 심어주고, 세뇌시켰기 때문이다. 한편 ‘마적대’와 같은 약육강식의 생존법칙을 가지고 부정부패, 패륜적 강탈행위를 일삼는 비적(匪賊)으로 변질시킨 것도 민생에 등을 돌려댄 김정일 정권의 책임이다.

탈북자들은 북한독재체제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의 입을 통해 세계는 북한인권의 잔혹함을 알아야 하며 진정한 민주화를 일구어내야 한다. 이번 탈북인 여성학대를 보는 나도 국경경비대의 행패를 당한 사람으로서 한마디 하고 싶다.

한영진 기자 (평양 출신 2002년 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