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떼려다 ‘혹’ 붙인 정부, 北과 외교전서 완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성명에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과 10·4 남북정상선언 문구가 뒤늦게 삭제된 것과 관련해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당초 24일 발표된 ARF 의장성명에는 우리 정부의 요구사항인 금강산 피살사건과 북측의 요구인 10·4선언에 관한 내용이 모두 담겨 있었으나, 우리 측에서 AFR 의장국인 싱가포르에 수정안을 요청한 이후, 이튿날인 25일에 남북의 요구가 모두 삭제된 채 최종 성명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안을 통해 10·4선언과 함께 금강산 피살 사건에 대한 언급도 삭제된 것에 대해 우리 외교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북측이 ARF에서 펼칠 외교 공세를 예측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우리 정부가 10·4선언에 관한 내용이 성명에 담기는 데 항의의 뜻을 전하고 있는 동안, 박의춘 북한 외무상 일행도 금강산 피살 사건과 관련해 싱가포르를 상대로 집요한 외교전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우리 정부로부터 성명의 수정 요청을 받은 싱가포르가 북측의 입장도 감안해 두 문장을 모두 삭제할 것을 우리 측에 제안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금강산 사건 해결을 위해 ‘국제 공조’를 하겠다고 천명한 뒤 ARF 무대를 통해 북한을 압박하려고 했던 우리 정부는 결과적으로 북측의 외교력에 밀린 듯한 인상만 남기게 됐다. 또한 북한의 외교력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해 국제사회에서 망신만 자초했다는 비판도 면하기 어렵게 됐다.

특히 금강산피살 사건에 대해서는 우리 측이 원했던 ‘남북대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부분이 빠지는 등 원론적으로만 다뤄진 반면 이명박 정부가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10·4선언에 대해서는 ‘강한 지지’라는 문구가 덧붙여져 상대적으로 크게 언급되면서 정부 일각에서는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완패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데일리엔케이’와 통화에서 “ARF에서 5~6개국이 금강산 사건에 대한 언급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는 우리 정부가 상당한 외교력을 발휘한 것”이라며 “다만 북한도 한국의 외교 공세를 예상해 나름대로 외교력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을 우리 정부가 감지하지 못한 점은 아쉽고, 비판 받을 소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정부가 의장성명에서 문구 삭제를 요청한 것은 비외교적 행동으로 비칠 수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정부가 빨리 결단을 내려 ‘10·4선언’과 ‘금강산’ 모두 삭제시킨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며 “사전에 대비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아쉽지만 삭제 없이 그냥 갔다면 국내 보수진영의 압박 등으로 상당 기간 시끄러웠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편, 교도통신은 이와 관련 금강산 ARF 의장성명에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의 조기해결을 촉구하는 내용이 다음날 삭제된 것은 북측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26일 보도했다.

통신은 ARF 참가국 소식통을 인용해 “AFR 의장국인 싱가포르는 북한이 아세안의 기본조약인 동남아우호협력조약(TAC)에 서명한 점을 중시, 북한을 자극하지 않도록 한국이 요구한 금강산 피격사건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지 않은 성명안을 참가국에 제시했지만 최종적인 의장 권한으로 금강산 사건에 대한 언급을 성명에 포함시켰다”며 “그러나, 북한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자 금강산 사건을 삭제했다”고 전했다.

통신은 이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북한이 요구한 10·4선언에 입각한 남북대화 진전을 지지하는 문구도 삭제한 것”이라고 경위를 설명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 관계자는 “수정 경위에 대해 자세히 밝힐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만 할 뿐 더 이상 언급을 피했다. 싱가포르 정부도 의장성명의 내용이 바뀌게 된 경위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정치권은 우리 정부의 외교력 부재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야권에서는 ‘외교안보 라인의 교체’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한나라당 차명진 대변인은 26일 “우리 외교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금강산 문제가 ‘10·4선언’과 산술적으로 균형을 맞춰 삭제한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민주당 김유정 대변인은 “외교 관례상 전례가 없는 일로 외교적 망신만 자초할 꼴”이라며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삭제사건의 사실관계를 국민 앞에 명확히 해명하고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한마디로 이명박 정부의 비전도 전략도 없는 외교력의 한계가 빚어낸 ‘참사’라고 밖에 평가할 수 없다”며 “어느 정권보다도 못한 참혹한 외교 성적표를 받은 외교안보라인은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사퇴하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