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 항일무장투쟁史, 김일성보다 4년 빨랐다

암스트롱(Charles Armstrong)에 따르면, 김일성이 유격대 활동을 시작한 시점은 1932년이다 (찰스 암스트롱 저, ‘북조선 탄생’ (서해문집, 2006), p.55). 그의 유격대 활동은 조선 국경과 가까운 안도현에서 시작됐으며 그는 중국구국군과 함께 활동했다. 최현 역시 1932년에 유격대 생활을 본격 시작했으나 중국구국군과는 별도로 조선인이 구성한 독자적인 유격대에서 활약했다. 최현이 입대한 연길현 유격대의 대대장은 박동근이라는 조선인이었다.

1932년 7월 윤창범, 방정준 등과 연길감옥에서 출옥한 최현은 ‘태양모 적위대’에 입대했다. 감옥에서 출옥할 때 그는 이름을 ‘득권’에서 ‘현’으로 고쳤다. 개명한 이름으로 태양모 적위대에 입대한 최현은 태양모에서 주로 무기확보 공작에 집중했다. 당시 태양모 적위대는 무기라고는 권총 한 자루 없었으며 날창, 지팽이창, 단도,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30명 규모의 소규모 부대였다. 따라서 이들에겐 무기를 획득하는 게 시급한 과제였다. 최현을 비롯한 이들은 악덕 지주들이 숨겨놓은 권총, 보총 등의 무기를 약탈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게 됐다.

“(중략) 그 때 적위대장은 이런 말을 했다. ‘현재 유격대도 조직되었고 유격대에 입대할 수 있는 사람들의 사상적 준비도 되어 있으나 무기가 적기 때문에 유격 대오를 장성시킬 수 없소. 그러니 우리들은 적극적으로 무기를 획득하여 유격대에 보내야 하며 또한 우리들도 무장해야 하겠소.’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무기를 꼭 탈취하여야겠다는 충동을 더욱 느꼈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국립출판사, 1964), p.50.

최현이 최초로 가담한 태양모 적위대는 사실 유격대가 아니었다. 앞에서 인용한 적위대장의 발언을 보면 태양모 적위대의 주 임무는 당시 결성된 타 유격대에 무기를 공급하는 일종의 공급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32년 10월 ‘연길현 유격대’로 자리를 옮긴 최현은 본격적인 항일 유격대 생활을 시작했다. 유격대 생활을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그는 공산당에도 입당했다. 악덕 지주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거나 추격하던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를 벌이는 등 최현은 무장 유격대 활동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연길현 유격대는 초기에는 자위대 습격 및 활동 교란, 무기 탈취, 중국인 지주 습격 등의 활동을 주로 했다.

“(중략) 얼마 후 박동근 대대장은 윤창범 동무와 나를 불러 첫 전투 임무를 주었다. 그것은 태양모 아래 부락에서 자위단 5명이 동쪽 산림 지대와 연길강 일대를 순회하면서 산림 지대에서 활동하는 우리 유격대와 구국군을 감시하고 있으니 그 놈들을 습격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윤 동무와 함께 대원 10명을 데리고 곧 태양모로 떠났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국립출판사, 1964), p.58.

1932년 10월 연길현 유격대는 처음으로 연길을 떠나 왕우구에 도착했다. 그들이 이동한 표면적 이유는 왕우구 주민들을 일본 토벌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우구 지역은 북동, 남동, 새지팡 등과 인접된 유격 본거지였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일찍이 일본군의 집중적인 토벌을 받아왔는데 그 곳 주민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일본군 토벌대들은 혁명의 기지이자 유격 근거지인 왕우구 지역 주민들을 탄압하고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에 주민들을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연길현 유격대는 왕우구 지역으로 이동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연길현 유격대의 이동 이유는 세력 확장에 있었다. 왕우구에서 그들은 화룡현 유격대 일부 대원들과 합세하여 세력을 더욱 불려나가게 됐다. 확대 재편된 연길현 유격대는 약 80명 정도의 병력으로 강화됐고 최현은 ‘정치부 소대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최현은 아픈 몸을 이끌고 ‘대동구 자위단’의 무장탈취를 위한 전투에 참가하여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1933년 초에 왕우구에서 최현은 처음으로 일본군 토벌대와의 전투를 치르게 된다.

“(중략) 우리는 그 해(1933년) 초봄에 왕우구에서 처음으로 적 ‘토벌대’와 싸우게 되었다. 이것이 근거지에서의 첫 방어전이었다. 이 때 우리에게는 탄알이 부족하여 매우 곤란하였고 의복도 여름 것을 입고 있었으니 몹시 추웠다. 전투는 저녁 때부터 시작하여 밤까지 계속되었다. (중략) 이 시기 얼빙개에서도 적 토벌대와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놈들은 한 50명이 되는 기병대들이었다. 이 전투는 주로 우리 유격대가 맡아 하였는데 탄알을 절약하기 위하여 미리 산 위에 돌을 쌓아 놓았다가 놈들이 포치선에 기어들면 일시에 굴려서 큰 전과를 거두곤 하였다. 이렇게 산 위에서 돌을 굴리면 나무 뒤에 숨은 놈도 버티어내지 못한다. 이것은 보총 몇 자루로써 사격하기보다 훨씬 위력을 낼 수 있었다. 그 후 우리 유격대원들은 총을 쏘기에 불리한 전투 때마다 잃게 돌을 굴려서 적을 섬멸하는 전술을 많이 썼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국립출판사, 1964), p.79-80.
 
왕우구 전투, 얼빙개 전투 등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무찌르며 자신감을 얻게된 최현은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국내 진입을 시도한 것이다. 물론 당시 최현은 유격대 부대를 이끌고 국내로 들어와 항일전투를 벌인 건 아니었다. 그는 동지 한 명과 함께 부일 협력을 하고 있던 조선인 순사를 처단하러 국내로 들어온 것이었다.

“(중략) 이해(1933년) 음력 7월 경에 나는 최춘국 동무와 함께 멀리 국내 온성에 들어와서 일제의 충실한 주구이며 혁명의 원수인 최 순사놈을 감쪽같이 처단한 일도 있었다. 이 시기 국내 온성, 훈융, 경원 일대에는 우리 조직이 깊이 뿌리 박고 있었는데 그 조직들은 수다한 물자들을 구입하여 유격대에 보내왔었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국립출판사, 1964), p.91.

위에 인용한 최현의 회고를 근거로 할 때 북한에서 주장하는 보천보 습격의 역사적 의미는 거짓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북한에서는 보천보 습격사건을 항일무장투쟁사에 있어 최초의 국내진공이라고 주장하며 그 의미를 확대 해석하려 하고 있으나, 사실 최현의 부일 순사 처단을 위한 온성 진입이 광의의 범주에서 볼 때 보천보 사건보다 4년 정도 앞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는 최현의 당시 시도보다 더 이른 국내 진공작전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국내 진공작전의 시원(始原)은 1919년 9월 홍범도 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에 진공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한 사건이다. 홍범도 부대는 김일성보다 18년 전, 최현보다 14년 전 이미 국내 진공을 감행했던 것이다. 연길현 유격대가 급속하게 확대됨에 따라 일본군 토벌도 점차 강화되어 갔다. 유격대 내에서는 자체적인 무장 전투력을 증강시킴과 동시에 대원들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군사훈련과 정치학습의 강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 같은 과업의 일환으로 한글 학습 사업이 진행됐고 당시까지 중국말밖에 모르고 있던 최현도 이 때 한글을 깨우치게 됐다.

“나도 중국 글은 좀 배웠으나 조선 글은 이때까지 거의 모르고 있었다. 조선 혁명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매일 제정된 시간에 의무적으로 우리글을 배웠으며 군사 훈련이 끝나면 사판에 나뭇가지로 글 쓰는 연습을 하였다. 상부에서는 글을 배우는 것을 군사 훈련에 못지 않게 강하게 추진하였다. 나는 차츰 우리글로 쓴 소책자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최현, ‘혁명의 길에서’ (국립출판사, 1964), p.78.
    
이렇게 볼 때 최현을 문맹이라고 규정하는 기존의 평가는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유격대 생활을 본격 시작하면서 글을 깨우쳤다. 그러나 그가 학습 토론에도 참여할 수 있을 만큼의 교양을 갖추게 됐다는 회고는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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