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한 분위기에 실무회담 가능성 커”

2일부터 사흘간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과 남한 대통령으로는 분단이후 처음으로 육로를 이용해 평양을 방북했다. 회담 첫날 모두의 관심은 김정일이 노 대통령을 영접하느냐였고, 결국 예정된 장소까지 변경하며 김정일의 ‘깜짝 영접’은 성사됐다.

이날 노 대통령은 출발에 앞서 오전 7시50분께 ‘평화정착’과 ‘경제협력’을 강조하는 ‘대국민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용차량을 이용해 방북 길에 올랐다. 서울 시내를 가로질러 9시께 MDL 앞에 도착한 노 대통령 내외는 차량에서 내려 불과 1m 너비로 그어진 노란색 선(M이)을 살짝 넘었다.

MDL을 넘어 북측 땅을 밟게 된 노 대통령의 입가엔 밝은 미소를 머금었다. 사뭇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노 대통령은 꽃다발을 전하며 환영하라 나온 북측 여성에 “사진 한 번 같이 찍자”고 권유해 같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 영접 나온 북측 인사는 최승철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비롯해 리상관 황해북도 인민위원장과 김일근 개성시 인민위원장과 등이 나왔다. 노 대통령은 이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고 악수를 나누는 노 대통령의 손목엔 개성공단에서 제작된 로만손 시계를 착용한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다시 전용차량에 탑승한 노 대통령과 남측 수행원들은 평양-개성간 고속도로를 달려 평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평양에서 70여㎞ 떨어진 황해북도 서흥군 수곡휴게소에서 5분 남짓 휴식했다.

이후 11시30분께 평양에 진입한 노 대통령은 일행은 당초 공식 환영식이 계획됐던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을 지나 ‘인민문화궁전’까지 내달렸다. 환영식 일정에 변화가 생긴 사실을 안 것은 10시20분께가 돼서야 가능했다.

이 무렵 북측 관계자는 환영식 취재를 위해 하루 앞서 방북했던 공동취재단에게 환영식 장소가 ‘인민문화궁전’으로 바뀌었다고 전달해 왔다. 이때부터 김정일이 행사장에 나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지만 북측은 어떠한 확인도 해주지 않았다. 이후 환영식장이 다시 ‘4.25문화회관’으로 바뀐 사실을 통보해 왔다.

이에 대해 남측 관계자는 “어제 북측과 환영 행사를 협의하던 중 북측 인사가 ‘놀랍고 재미있는 행사가 될 것’이라고 말해 김정일이 행사장에 나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전날 북측과 협의를 마치고 내려온 남측 경호 담당자도 “호위나 경호가 잘 되고 있어 멋진 장면이 연출될 것 같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북측의 특성상 김정일의 안전보장을 위해 공식 환영식장으로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이 사전에 공개되었던 것은 남측 언론에 김정일의 동선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한 북측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행동으로 해석된다.

평양에 들어선 노 대통령은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은 후 김영남과 함께 오픈카에 탑승, 연도에 나온 수십만 명의 평양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20분가량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환영 나온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조국 통일”을 외치고 있었다.

오픈카를 타고 인민문화궁전을 출발한 대통령 일행은 개선문을 지나 4.25문화회관에 12시2분께 도착했다. 김정일은 노 대통령이 도착하기 7분 전인 11시55분께 미리 도착해 노 대통령이 차량에서 내리는 지점에서 기다렸다. 김정일이 모습을 보이자 4.25문화회관 앞에 줄지어 서있던 환영인파는 “만세~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차량에서 내린 노 대통령 내외는 구부정하게 서있던 김정일과 악수만 나눴다. 김정일은 2000년 정상회담 당시와는 달리 뜨거운 포옹도 환한 웃음도 내보이지 않았다. 다소 얼굴이 부어 보이는 듯 한 김정일의 모습에선 7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노쇠하고 병약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노 대통령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 붉은 카펫 위를 걸어갈 때도 김정일은 걸음걸이는 자연스럽지 못했고 갈지자걸음을 하기도 했다. “만세”를 목청껏 외치는 평양 시민들을 향해 아주 가끔씩 손을 들어 보이거나 박수를 몇 번 치는 정도였다.

때문에 지난 5월 독일 의료진으로 부터 ‘풍선확장술’ 시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이 당뇨와 심근경색 등의 지병으로 몸이 많이 쇠약해진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약 10여분 가량 진행된 공식 환영식이 끝난 후 노 대통령은 김정일의 배웅을 받으며 ‘백화원 영빈관’으로 이동했다. 지난 2000년엔 김정일이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차량에 탑승해 백화원 영빈관까지 안내했던 경험이 있어 이번에도 그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양 정상은 서로 다른 차를 타고 이동했다.

노 대통령과 김정일의 첫 상봉일정은 회담 당일까지도 극비에 가려지는 등 철통 보안 속에 이뤄졌지만 지난 1차 회담 만큼의 감동은 주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물론 7년 전 이미 한 차례 정상회담을 경험한 바 있어 기대부터 크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4.25문화회관에서 보인 김정일의 모습이 매우 노쇠하면서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관했다는 데에 자인하는 바가 없지 않다. 김정일의 이 같은 행동이 사전에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인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환영식을 마치고 12시21분께 백화원 영빈관에 도착한 노 대통령은 김국평 영빈관 소장의 안내를 받고 여장을 풀었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노 대통령이 숙소에 도착한 뒤 돌아갔다.

백화원 영빈관에서 공식 수행원들과 오찬을 마친 노 대통령은 오후 4시부터 남측의 국회의사당 격인 ‘만수대 의사당’을 찾아 김영남과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권오규 경제부총리 등 남측 공식 수행원이 자리를 함께했고, 북측에선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등 9명의 내각 책임자들이 배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남은 “점심 드셨습니까. 이번에 육백리 먼 길을 오셨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고, 이에 노 대통령은 “위원장님 말씀을 듣고 보니 먼 길인데, 감회가 새롭다”면서 “느낌은 가까운 것 같다. 이번 방북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회담을 마친 후 노 대통령은 김영남과 만수대 의사당을 내부를 관람한 뒤 방명록에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는 글귀를 남겼다.

노 대통령과 남측 대표단은 저녁 7시, 목란관에서 김영남이 주최하는 공식 환영 만찬에 참석해 남북관계 발전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그러나 환영 만찬에 모습을 드러내리라 기대를 모았던 김정일의 모습은 끝내 보이질 않았다.

한편, 만찬장에서는 건배 연호가 잦아들 즈음 헤드테이블에 앉아 있던 노 대통령이 갑자기 술잔을 들고 사회를 보는 자리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지는 가운데 생긴 갑작스런 일이라 긴장감마저 조성됐다.

노 대통령은 “오늘 저녁에 여러분들이 각 테이블에서 건배하는 것을 보니 신명이 좀 나는 것 같다”며 “나머지 테이블은 따라 하자니 그렇고 안 하자니 기분이 안 풀리는 것 같으니 다 같이 기분을 풉시다”고 말했다.

이어 “남북한 간에 평화가 잘되고 경제도 잘되려면 빠뜨릴 수 없는 일이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시고, 또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건강해야 한다”며 “좀 전에 (제가) 건배사를 할 때 두 분의 건강에 대해 건배하는 것을 잊었다”고 했다. 만찬장은 일순 고요해졌다.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 “신명난 김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영남 상임위원장, 두 분의 건강을 위해 건배를 합시다”며 “위하여”를 선창해 남남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신중치 못한 발언이란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선 환영식에 나온 김정일의 모습이 병약해 보여 이런 제의를 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노 대통령이 김정일의 건강을 기원하며 건배를 제의한 데 대해 일부 북측 관계자들은 오히려 “남측 언론에서 문제삼지 않겠느냐”고 우려하기도 했다.

2000년 회담 당시엔 회담 첫날부터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등 수 많은 뉴스를 쏟아 냈지만 이번 회담에선 상대 연기자인 김정일이 10분 가량만 출연하고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다소 맥이 빠졌다는 게 안팎의 평가다.

이와 관련, 남주홍 경기대 국제정치학과 교수는 “오늘 김정일이 노 대통령을 환영 나온 것은 상당히 형식적인 측면이 강하다”며 “2000년 같은 물밑거래가 없어서인지 판에박힌 형식이었다. 내일 전망은 이미 의제에 대해 여러 예측들이 나오고 있지만 잘못하면 정치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정책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선 사전에 의제에 관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비핵화 논의 등은 우리 정부가 일방적으로 논의하려는 것이어서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며 “오늘 환영식이 형식적인 것을 보아서도 회담이 크게 기대할만한 결과를 낳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환영 행사 등을 보니 이번 정상회담은 상당히 실무적인 회담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면서 “여러 의제가 심도있게 논의될 분위기가 느껴진다. 평화체제나 경협 그밖에 예상됐던 대부분의 의제들이 일단 의미있는 논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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