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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4월. 방북 당시 첫 사업 상담 대상은 북한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당에서 직접 운영하는 <대성총국>의 ‘제3국 (먼 바다 사업)’ 책임자였다. 책임자 이름은 김호만. 그를 만나 북한 수산업에 대한 실무상담을 했다.
나보다 세 살 위인 그는 일본과 명태잡이 협력사업의 실무경험이 있는 호탕한 인상을 가진 여유 있는 풍모로 기억된다. 상담 자리에서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북한의 수산업에 대하여 장시간 진지하게 대화했다.
서로가 수산업 실무에 종사한 경험을 기초로 한 내용이라 의사 접근이 쉬웠고, 미리 준비해 간 미국과 한국 수산업 현황의 참고자료와 북한수산업에 대한 사업계획서를 주면서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상담 중 눈치를 보니 나의 여망과는 달리 김호만 국장의 표정은 냉담한 듯했다. 이후 라진-선봉 특구에 선박수리공작소를 건설하는 계획과 북태평양 어장 진출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기초자료를 준비하여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
초청회사인 대성총국 측에서는 마중 나오지 않고 낯선 두 사람이 필자를 반겼다. 처음 보는데도 어떻게 잘 알고 “찬구 사장 선생이지요?” 한다.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니 저녁식사 시간이다. 초청자 측이 호텔식당에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지난번 관광 때보다 훨씬 편안했다. 인삼주로 피로를 풀면서 늦도록 사업 이야기와 가족들과 미국생활에 대한 그들의 궁금한 것들을 가벼운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대성총국>에서 초청은 했지만 해외동포이기 때문에 ‘해외동포 원호위원회’에서 두 사람과 보위부 직원 한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이 마중을 나온 것이다. 그들이 안내를 담당한다고 했다.
계약이 목적 아니라, 술먹는 것이 목적?
자가용 운전수를 포함해 네 사람이 고정적으로 내가 입국하여 출국할 때까지 나와 같은 호텔에서 숙식을 하면서 신변보호와 평양 체류기간 동안 모든 일을 나를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다. 사업상담 회사에서는 출퇴근 방식으로 나와 면담을 했다. 자기네들 딴에는 손님을 극진히 모시는 자세가 역력했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고 낭비인 것처럼 보였다.
안내가 체류기간 동안의 계획을 대충 말하는데, 반강제적인 참관이 들어 있다. 김일성 생가며, 혁명 사적지며 등등이다. 지난번 관광 때 구경했다고 해도 무조건 참관하고 참배해야 한다고 했다. 따를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오전 중 김일성 생가, 동상, 혁명박물관을 돌고, 점심 먹고 휴식하고 나니 오후 2시다. 이때부터 상담을 하고 나니 곧 바로 저녁식사 시간이다. 오늘 뭘 했는지 알 수가 없다.
호텔 2층 복도에 대여섯 사람 앉을 정도의 자그마한 카운터 하나가 생겼다. 지하실에 있던 것이 2층으로 옮겨 왔다고 했다. 안내가 심심한데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 그들은 많이도 마셔댔다. 그들은 밤이면 늦도록 술을 마시고 담배 피우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듯 했다. 1대 3으로 술을 먹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이들의 술타령이 그 당시 가장 인상에 남는 행동이다. 계약을 잘 성사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와 술 마시는 것이 목적이라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매일 밤 술이다. 저녁이 되면 술 아니면 할 일도 없다. 안내가 가만 두지를 않는다. 웬 술을 그렇게도 많이 마시는지 며칠은 즐거웠는데 나중에는 밤이 괴로웠다. 허튼 소리라도 나왔다간 큰일 난다. 실컷 마시고도 모자라 안주와 술, 담배까지 아예 싸가지고 방으로 간다. 그들은 그것이 나를 만나는 목적이자, 삶의 유일한 낙인 것처럼 보였다.
대동강변에서 김일성 혁명사 외우는 청년
평양체류기간은 사업보다도 술에 찌든 채 정신없이 지내다 출국할 때도 있었다.
1989년 4월, 사업상담 차 평양을 다녀온 후 협의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논도 하고 귀국했기에 새로운 사업계획 준비에 바빠졌다.
89년 7월 평양을 다시 찾았다. 고려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첫날 아침은 안내원과 함께 아침 산책을 했다.
아침 일찍 6시쯤 호텔 문을 나서려니 경비가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산보하러 간다’고 하니, ‘못 나갑니다’고 한다. ‘왜 못 나가냐’ 하니, ‘안내원과 같이 나가야 된다’고 한다. ‘안내원 쿨쿨 잔다’고 했더니. ‘깨워서 같이 나가라’고 대답한다. 결국 안내원이 자는 방으로 갔다. 문을 두들기니 아직 한밤중이다.
간밤에 자정이 넘도록 술을 퍼 마셨으니 새벽에 일어나기도 힘들지… 억지로 데리고 역전 백화점을 지나 평양역 지하도를 지나 대동강 쪽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걸음의 속도를 더 냈다.
매일 아침 안내원을 데리고 나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생략하기 위해 작전을 세웠다.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걷는 거다! 역시 내 작전은 성공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운동이 된다며 계속 빠르게 걸으니, 안내원은 결국 포기하고 호텔로 되돌아가면서 “7시 30분까진 식당으로 오셔야 합니다!”고 한다.
해방이다. 혼자 가다가 누구라도 만나면 말을 걸자고 작심하고 대동강으로 향했다. 한 학생이 구석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뭔가를 중얼중얼 외우고 있다.
“동무 안녕하십니까? 나는 재미동포인데요. 아침 산보 나왔는데…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나요?”
누런 종이에 깨알글씨다. 내 눈에는 안 보인다. 물어 보니 ‘작은 종이에 많은 내용을 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내용은 ‘수령님 혁명사’라고 말했다. 다른 과목은 90점 이상이면 되지만 혁명사는 무조건 100점을 맞아야 당원이 될 수 있고 또 졸업 후 좋은 직장에 배치되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혁명사업에 동참 할 수 있다는 것이다.(계속)
김찬구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LA 동국로얄 한의과대학졸업, 미국침구한의사, 중국 국제침구의사.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졸업-북한학 석사. -세계화랑검도 총연맹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