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7차 당(黨) 대회 준비차원에서 실시한 ‘70일 전투’가 끝나자마자 새로운 5개년 경제전략 수행을 위한 ‘200일 전투’를 선포했다. 이에 대해 북한 노동신문은 1일 사설 ‘모두다 충정의 200일 전투에서 영웅적 위훈을 창조하자’를 통해 “200일 전투는 당 7차 대회 신을 백방으로 옹위하고 굳건히 받들어나가기 위한 충정의 대전투”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떨까? 필자의 경험으로 봤을 때 70일 전투와 200일 전투를 직접 치르는 북한 주민들에게는 ‘충성심’이 아닌 오히려 ‘악’만 남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1989년 양강도 보안국 도로건설여단 00대대 2소대장 자격으로 ‘평양-개성 고속도로 건설’에 동원돼 200일 전투에 참가했었다. 보안부(당시 사회안전성)는 황해남도 금천군과 개성시 삼거리 지역의 도로구간을 맡고 있었고, 각 여단(도)과 대대(군)들에서는 도로포장과 터널공사를 분담받았다.
죽음의 200일 전투가 시작된 89년 2월 ‘충성의 선서’모임이 진행됐고 각 대표단들이 충성의 결의를 다짐하기도 했다. 필자가 양강도 여단을 대표해 낭독한 결의문에도 200일 간의 전투 목표가 반영, 1일, 10일, 100일 단위로 구체적인 전투(작업)과제가 제시됐었다.
이처럼 200일 전투 기간에 동원된 주민들은 200일 분의 1을 하루 계획량으로 잡고 평일의 두 배, 세 배의 과제를 해야했다. 당시 여단 참모부에서는 전투원들에게 ‘충성의 200일 전투 기록장’을 만들도록 강요했다. 이에 따라 여단의 모든 대원들은 매일 계획량을 점검받았고, 계획 미달자들은 밤을 새면서라도 일을 해야만 했다.
때문에 부작용은 곳곳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다. 도로포장에 필요한 자갈채취로 채석장에서는 돌사태에 깔리는 사고도 많았고 위에서 던지는 돌에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져도 그날 과제를 무조건 수행해야 했다.
특히 이런 사고에도 힘들다고 물러나면 낙후분자로 낙인이 찍히게 되고 정치적인 평가에서 뒤로 밀리게 된다. 각종 불이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못 다한 과제를 수행하려고 밤을 새는 주민들도 많았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북한 당국이 선포한 200일 전투로 평양-개성 고속도로 공사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처벌에서 벗어나려는 군인들과 돌격대원들의 사투는 눈뜨고 차마 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점은 당시 금천교 기둥붕괴로 수천 명의 군인들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난 당시에도 현장수습과 다리건설이 동시에 이뤄졌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군인들의 하루 과제가 사고현장 수습으로 미뤄지게 되면 다음에 또 그 만큼 힘이 든다고 생각한 해당 군부대에서는 시신수습과 다리기둥 복구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북한 당국의 무모한 200일 전투로 당시와 같은 참사가 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고 생각한다. 김정은 체제는 지금 이 시각도 200일 전투로 몸살을 앓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는 노동도구로밖에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김정은이 주민들을 죽음에로 내모는 200일 전투를 당장 그만둬야 한다고 주위 탈북민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아마 지금 북한 주민들의 심정도 이와 다르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