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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장군은 민족의 태양이시다> <중한 민족연합 만세> <타도 일본제국주의> 이것은 김일성이 항일 무장투쟁을 진행할 무렵 부대원들과 조선인민들이 그를 찬양하고 독립을 기약하며 나무에 새겼다는 글귀이다. 이외에도 <조선에 백두광명성이 솟았다> <조선아 기뻐하라 또 하나의 장군별이 솟았다> <백두산에 광명성이 떴다. 광명성을 미래로 우리민족 존엄 떨치자> 이것은 김정일이 태어나자 이를 기뻐한 항일 빨치산들이 북한 곳곳에 있는 나무들에 새겨놓았다는 구호들이다.
이 나무들이 등장한 시기는 대개 1920-1930년대이고, 이것을 만든 사람들은 김일성을 따르던 항일 빨치산 대원들이라는 것이 북한 당국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 ‘구호나무’와 ‘구호문헌’이 평양의 언론에 본격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87년 2월 당시 김정일 당 비서의 45회 생일 때부터 였으며 이후 북한 각지에서 현재까지 약 1만 2천여점이 발굴됐다는 것이다. 지역별로 보면 함북 7천 400점, 한남 600점, 자강도 500점, 양강도 400점, 평양시 370점, 평남 250점 등이다. 이 가운데 김주석과 관계된 것은 1천260여점, 김정일위원장과 관계된 것은 210점, 김정숙을 칭송한 것은 330여점인 것으로 알려졌다.<02.3.25. 조선중앙방송> 수 십 년 동안 보고되지 않던 구호나무가 발견사업이 제기되면서부터 갑자기 전국적으로 수 만점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한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에 구호나무를 발굴했다고 했을 때는 김일성에 대해서 찬양한 것들만 있어서 북한인민들은 진짜라고 믿기도 했지만, 점차 김정숙과 김정일에 대해서 찬양한 것마저 나왔다고 하자 일부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항일업적을 찬양하는 글귀를 부대원들이 먹물과 붓을 가지고 다니면서 나무껍질을 벗기고 먹으로 써놓았다는 것도 의심스럽지만 동북항일연구 일개 부대장이었던 김일성의 아이가 태어난 것을 두고 ‘백두광명성이 떴으니 그와 함께 민족의 존엄을 떨치자’는 글귀를 새겼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지금이야 김정숙이 국모로 숭상받고 있지만 당시만 하여도 빨치산들의 식모 역할을 했고 글도 잘 몰랐던 사람에게 빨치산들이 ‘우리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북한당국은 삼지연에서 동남쪽으로 10km 가량 떨어진 청봉숙영지에서 발견된 구호나무 20여그루는 손상을 막기 위해 8-11m 높이의 두꺼운 5각형 전도유리로 씌워 보존하고 있다. 참관객들이 없는 밤에는 두꺼운 휘장으로 전체를 감쌋다. 여기에다 내부는 순도 99%의 아르곤으로 채워져 있고 섭씨 20도의 상온을 유지하기 위해 컴퓨터 시설을 갖춘 중앙통제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혹시 부근의 나무가 쓰러져 구호나무를 훼손 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고목들을 철봉으로 떠받쳐 놓은 것은 물론 벼락피해를 막기위해 피뢰침까지 설치돼있다. 산불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50여개의 스프링쿨러를 설치했고 전적지 주변 10리에 폭 1백여m로 나무를 완전히 벌채해 방화선을 쳐놓았다.’<동아일보 98.9>
원래 구호나무라는 것은 항일 빨치산들이 회상기를 쓰면서(대부분 전기 작가들이 써 준 것)구호나무라는 것을 생각해냈는데 이를 혁명전통을 신비화 하기 위해서 김정일의 지시로 만든 우상화 선전물에 불과하다. ‘김정일’의 저자 이찬행은 중국 동북지역에 해당하는 백두산에도 ‘구호나무’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외에는 어느 것 하나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구호나무가 발견된 곳이 중국일 수도 있다. 원래 그곳에 존재 했을 수도 있고 후일 북한 당국이 새겨 놓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백두산 3대장군의 찬양 일색이며 전국적으로 수만점이 발견되었다는 북한당국이 내세우는 ‘구호나무’의 본질과는 한 참 동떨어진 것이다.
황장엽 전 비서는 저서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에서 “당시 부대원 중에 국내에 파견된 사람은 한 두 명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붓을 가지고 다니면서 나무껍질을 벗기고 먹으로 구호를 써넣었겠는가? 또 그렇게 먹으로 쓴 글씨가 어떻게 수 십 년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그대로 보존되었겠는가? 그 무슨 특수약품을 바른다고 해서 원형처럼 그대로 복원이 되겠는가?…..김정일의 탄생을 ‘광명성의 탄생’이라고 한 것은 날 때부터 지도자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는 것인데 빨치산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영도권을 세습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고 증언했다.
당시 구호나무가 발견되기 시작한 80년대 중 후반은 김일성을 신격화 시키는 작업이 최고 절정에 올랐던 시기다. 백두산 밀영을 고향집으로 우기고 백두산 근처에서 ‘구호나무’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김일성이 조선독립을 해방시키는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 뒤를 김정일이 이끈다는 혁명역사를 조작해내기 위한 것이다. 국내 일부에서는 이 구호나무의 진실을 일정정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이것은 결국 북한당국의 혁명역사 날조에 동참하는 것 이외에 하등 도움이 될 것이 없다.
The DailyNK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