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전쟁영웅 이백겸 지난해 혜산서 굶어죽어”

지난 1970년대 북한의 유명한 예술영화인 ’36호의 보고’에 나온 실존 인물인 이백겸이 2009년 12월말 살고 있던 양강도 혜산에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아사(餓死)했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26일 전했다.


RFA는 양강도 소식통들의 말을 인용, “전쟁 공로자로서 나라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던 이백겸이 2009년 12월 28일 혜산의 한 장마당 인근에서 비참하게 굶어죽은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며 “사망 직전까지 혜산시 연봉동 인근에서 오랜 세월 굶주림에 허덕이며 생활해왔다”고 전했다.


방송은 이어 “다른 전쟁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이백겸은 1960년대 말까지 그야말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며 “해방 이후 남로당 당원으로 암약하던 이백겸은 1950년 6·25전쟁 발발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고향인 강화도와 인천 일원에서 ‘반동분자’ 색출에 앞장섰고, 인천상륙작전 후에는 인민군에 입대, 통신병과 무전수로서 국군의 후방침투를 막는 등 첩보활동을 벌여 30대에 양강도 보위부 반탐과장을 맡는 등 승승장구 했다”고 전했다.


특히 RFA는 “지금도 북한 도서관의 비공개 도서목록에 ‘위대한 수령님의 전사 이백겸’이라고 씌어져 있는 이백겸의 수기가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남로당 당원들에 대한 숙청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면서 남로당 출신인 이백겸도 비켜갈 순 없었고 보위부에서 밀려나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좌천되고, 나중에는 지도원으로 강등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고 방송은 밝혔다.


탈북자 한동주 씨에 따르면 이백겸은 퇴역 이후 국가에서 준 배려아파트(특별한 공노자들에게 주는 아파트 살림집, 혜산시 혜명동 양강도당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음)에서 살 수 있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고 딸은 교원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아들은 대학에도 보내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은 전쟁노병들에게 특히 가혹했다. 이백겸의 경우는 자식들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아들은 하루가 멀다고 보안서 구류장에 들어 않는 좀도둑이었다고 한다. 이후 이백겸은 가까운 전쟁노병들과 함께 연봉산 주변 밭들의 돌담들을 허물어 다람쥐나 쥐굴들을 털고 살 정도로 힘든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함흥 출신의 탈북자인 박광일 씨는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흑백 텔레비전을 통해 본 기억이 난다”며 “6·25전쟁 때 후방에 침투한 남조선 특공대의 위치를 파악해서 북한 인민군이 남조선 특공대를 전멸하게 된다는 얘기로 이백겸 씨의 혁혁한 공을 예술 영화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 사회는 끊임없이 권력구도에 의한 체제모순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며 “어느 한 순간이라도 김정일, 김정은 부자가 마음만 먹으면 중앙당 비서도 갈아치울 수 있기 때문에 북한에서 정치적 배경과 출신성분만을 믿고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