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통한 대북지원 실시해도 5.24 골격 유지해야

정부는 지난해 3월 발생한 천안함 사태 이후 처음으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재개했다. 통일부는 8일 2009년 대북 인도적 지원용으로 유엔 산하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를 통해 지원한 1312만 달러 가운데 천안함 사태 이후 집행이 보류됐던 694만 달러의 집행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천안함 폭침을 사과하지 않았지만 북한의 열악한 의료 현실과 국제기구의 지원 요구, 남북관계를 감안해 내린 결정으로 보인다.     


이번 조치는 류우익 통일부 장관이 밝혀온 남북관계 유연성 조치의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류 장관은 취임 이후 ‘유(류)연성 장관’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남북관계에서 유연성을 강조해왔다. 전직 현인택 장관이 다소 경직됐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5.24조치의 원칙을 유지했다면 류 장관은 여기에 얽매이지 않고 줄건 주면서 남북관계를 풀어가겠다는 의미다.
 
WHO를 통한 대북 의약품 지원은 천안함,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하기 위한 5.24조치의 일관성을 침해한다. 정부는 5.24조치에도 영유아 및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은 유지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이는 소규모 민간차원에 국한됐다. 정부 차원에서 600만 달러 상당을 국제기구를 통해 지원한 것은 대북 지원사업의 원칙적 보류입장에서 후퇴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5.24조치의 일관성이 침해되고 천안함,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책임있는 조치를 끌어내는 압박이 다소 느슨해진다고 해도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북한 주민 개개인에게 구체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지원이라면 우리는 정치적 변수를 최소화 해 그들을 도울 필요가 있다. 이는 정부의 일관된 정책이어야 한다. 북한 주민에 대한 동포애와 책임의식이면서도 북한주민과 남한주민 간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인도적 지원이 대북정책의 일관성, 정치적 상황을 무시하고 진행될 수는 없다. 과거 노무현 정권은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식량, 비료지원을 재개했다. 모니터링도 확보 되지 않은 대규모 인도 지원은 사실상 ‘면죄부용 뇌물’이나 다름없었다. 인도적 사안을 정치행위로 이용한 대규모 지원은 김정일 정권의 배만 불렸고 그 여파는 몇 해 지나 천안함 피격으로 돌아왔다. 


결국 대북지원을 결정하는 데 있어 정부의 판단과 전략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시기와 규모, 방법을 적절히 고려해 북한 주민의 고통을 덜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은 시종일관 우리의 숙제이다. 인도지원 사업은 향후 점진적 확대를 모색해야 한다. 이번 WHO를 통한 지원 외에도 북한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결핵 치료도 시급한 지원 분야다. 북한에서 결핵 치료사업을 벌여온 지원단체의 발이 묶여 있는 만큼 이를 풀고 확산 방지를 위한 적절한 지원이 필요하다.


다만 류 장관의 유연성 기세를 봤을 때 인도적 지원 수준을 넘을 가능성이 적지 않은 점은 우려스럽다. 북한이 여기에 호응하면 이후 이산가족 상봉이나 대규모 식량지원에 이어 금강산 관광 같은 굵직굵직한 사안들까지 도마 위에 오를 상황도 예견할 수 있다. 북한은 두 손 들어 반기고 남측에서는 정상회담 성사용이라는 의구심과 함께 심각한 갈등 양상이 조성될 수 있다.    


천안함, 연평도 해결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이러한 선조치는 결국 북한의 기세를 강화하고 남남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류 장관이 남북관계에서 어떤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북한이 류 장관의 사탕발림에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상대가 아니다. 그런 묘수는 없다. 류 장관의 유연성이 투명한 인도적 지원을 넘어 5.24조치 전반을 흔든다면 이는 이명박 정권 대북정책 전체를 실패로 귀결시킬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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