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DA 파격해제…’베를린 회동’ 진실은?

미국은 19일 BDA에 묶인 북한자금을 모두 풀어주겠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북핵 폐기를 위한 초기조치 이행의 전제조건은 사라졌다. 이번 발표는 베를린 회동에서 양국이 합의한 결과에 따른 것이지만, 파격적인 조치임이 분명하다.

이번 BDA 북계좌 전액해제 조치는 2∙13합의나 수교회담과 비교해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번 BDA 해제는 북한의 요구사항을 미국이 행동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향후 회담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핵 프로그램 신고와 폐쇄라는 초기조치를 넘어 불능화까지 내달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북한은 2005년 9∙19성명 이후 BDA 해결 없이는 북핵 진전은 불가능하다고 버티며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까지 감행했다. 미국은 국내법에 따른 조치이므로 6자회담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으로 팽팽히 맞섰다.

미국은 대북 금융조치를 전 세계로 확장시킬 태세로 관련 당국자들을 전세계에 급파해 대북 금융제재 환경을 조성했다. 여기에 유엔제재 결의까지 가세했다. 미 고위당국자는 북한 위폐가 한 장도 발견되지 않을 때까지 금융제재는 계속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국의 벼랑 끝 대립은 지난 1월 베를린 회동을 통해 극적으로 전환됐다.

이번 조치는 양국의 베를린 합의의 파급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준다.

북한의 ‘크리티컬’한 사정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을 본다면 베를린 회동에서 북한은 미국에게 불능화 조치까지는 약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시한이 정해진 분명한 거래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보유한 플루토늄과 핵무기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가고 있다. 김계관 부상도 뉴욕에서 “핵무기는 논의 대상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북한이 이미 보유한 핵무기 폐기에 대한 약속까지 받아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북한에게 이미 보유한 핵무기 폐기를 약속 받지 않고서도 BDA문제 등에서 대거 양보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또한 그 동안 나온 협상 관계자들의 언급을 통해 유추할 수 밖에 없다. 이명박 전 시장은 힐 차관보와 회동한 뒤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회담에 응하게 된 데는 뭔가 크리티컬(critical-결정적인)한 것이 있고, 이 정도 단계에 북한이 올 수밖에 없는 사정이 북한에 생겼다는 것이다. 미국은 상당한 자신감을 보였다”고 말했다.

힐 차관보의 당시 피력한 자신감은 북한의 알 수 없는 ‘그 사정’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이러한 사정을 미국의 대북압박으로 비롯된 북한의 경제∙외교적 고립을 지적한다. 그러나 핵실험까지 실시한 마당에 갑자기 항복선언을 하고 나올 리는 만무하다. 이와 관련, 최근 힐 차관보는 매우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 그는 “북한 사회 내에 핵문제에 대해 강경파가 존재한다”며 “강경파는 핵을 군사적으로 사용하면 대외적 위상을 높이고 대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북핵 협상 당사자가 갑자기 북한 전문가로 돌변해 북한 내부 핵 갈등구조를 설명하고 나선 것이다. 힐 차관보에게 이런 속사정을 전할 사람은 누구겠는가. 힐 차관보의 말을 바꾸어 말하면 김 부상을 비롯해 외무성 등 협상파들은 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을 바라고 있는데 군부가 강하게 나와서 해결이 안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김 부상에게 협상을 지시하는 김정일도 협상파에 포함될 것이다. 북한 핵 문제는 김정일의 문제에서 군부의 문제로 옮겨간다. 이러한 인식을 북핵 문제를 좌우할 미국의 협상 당사자가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힐 차관보의 발언을 통해 추측해보면, 김계관은 힐과의 협상 과정에서 ‘BDA 등 대북 압박으로 협상파가 고립돼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핵실험까지 주도했다’고 말하고, ‘미국이 BDA를 풀어주고 관계개선에 적극 나서면 우리는 불능화 조치, 대 테러전쟁 협조를 약속하고 이후 상황의 진전에 따라 이미 보유한 핵무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의 정치적 접근, 화 키울 가능성

이라크와 이란 문제에 발목이 잡힌 부시 대통령은 북한과 이란의 핵 거래를 막고 협상을 통한 북한 지도부의 해결의지를 일단 액면 그대로 믿어보기로 하고 협상 개시를 선언했을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성립한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 따르면, 김정일은 평소 “미국을 속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쉽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황 전 비서는 2∙13합의를 두고 김정일이 교활하게 승리했다고 평가했다.

만약 북한이 초기 조치 이후 모든 핵무기를 포기한다면 부시 행정부는 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이라는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핵 프로그램은 포기하되, 핵무기는 논의 대상이 아니라고 미루거나 거부한다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게 된다. 부시 행정부에는 이를 바로 잡을 시간도 없다. 북한과 대화가 진척이 없다고 해서 현 협상국면을 일순간에 강경책으로 반전시키기는 쉽지 않다. 대선국면을 앞두고 무력을 동원하기도 어렵다. 김정일은 여기까지 계산이 섰을 것이다.

미국은 향후 2년간 2∙13합의 이전의 대북정책으로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성과를 내 차기 대선에서 공화당에 힘을 불어넣어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을 것이다. 북한이 이미 보유한 핵무기와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은 직접 대화를 통해 북한의 투명한 조치를 요구하지 않으면 해결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동결은 큰 의미가 없다. 북한과 협상을 통한 정치적 성과도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래게 돼있다. 장기전이 되더라도 북한을 근본적인 변화 상황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수단을 포기한 것은 큰 손실이다.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북한에 말려드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클린턴이나 부시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미국은 북한을 배우기 위해 수업료를 두 번 내야하는 호사를 치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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