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평양주민도 점심 굶었다

▲ 평양 공장일꾼들이 곰인형을 생산하고 있다. 당시 1996년에는 평양 주민들도 점심을 먹지 못하고 일을 했다 ⓒ데일리NK

평양의 겨울은 혹독하다. ‘춥고 배고프다’는 옛말이 딱 맞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1996년 가을 공장일꾼들의 바느질 기술 점검을 하기 위해 사장과 함께 재봉틀 앞을 지나가는데 순간적으로 일꾼들의 발을 보게 됐다. 늦가을 싸늘하기 시작했는데 여름용 슬리퍼와 운동화를 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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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여명의 일자리를 지나가면서 관심 있게 신발을 보니 거의 다 슬리퍼 아니면 헤어진 운동화, 뒤꿈치를 접어 신은 떨어진 운동화였다. 비닐 신발에 발가락이 나온 사람도 있다.

아차! 내가 왜? 이 사람들의 발을 아직까지 못 봤단 말인가? 그저 제품만 잘 만들어 달라고 바느질만 봤지 도대체 내가 뭘 보고 다녔단 말인가? 주인 배부르면 머슴 배고픈 줄 모른다더니 못난 내가 그 짝 났단 말인가? 마음이 급해졌다.

안내원 두 사람, 부사장(부사장은 당에서 파견 한 당 서기로써 기업소의 총 감독관이다), 공장지배인 등이 줄줄이 따라다닌다. 사무실로 돌아온 필자는 김명선 사장에게 물었다.

“김 사장! 공장에서 일 하는 일꾼들은 내 가족이고 사장 식구지?”
“네 그렀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잘 못 만들어 진 곰을 보았습니까? 잘못된 것이 있으면 지적해주십시오”
“사장동지! 일 하는 사람들의 신발을 본 적이 있나? 부사장 동지나 지배인도 본 일 있나?”
“아니요 신발이 왜요?”
“사장은 아직도 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못하고 있으니 아직도 멀었어 멀어. 사장 자격이 안돼!”
사장은 내 얼굴만 쳐다본다.
“지금 당장 공장에 가서 일꾼들의 신발을 보고 오시오” 냉큼 쫓아냈다.

춥고 배고픈 북한의 수도 ‘평양’ 사람들

돌아온 김 사장의 말이 가관이다.
“우리는 신발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이제 추워지면 다 들 알아서 합니다.”
“김 사장!”
“네”
“내가 올 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있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솜씨나 곰, 강아지, 당나귀가 잘 만들어진 것만 보지 말고 일꾼들이 어떻게 사는 지도 잘 관찰하여 우리 다 함께 같은 식구처럼 살아가도록 머리를 쓰라고 했지? 그리하여 우리 공장이 공화국에서 제일 잘 되는 모범 공장으로 만들어 위대하신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를 기쁘게 해 드리자고 약속했지!? 그랬어 안 그랬어?”

김정일, 김일성 애기를 꺼내면 이들은 내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강조해서 말했다. 고개만 숙이고 대답이 없다.
“부사장동지! 내 말 기억나요?”
나는 사장과 의형제를 삼았기에 말을 탕탕 낮추어 하지만 부사장에게는 꼭꼭 높인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는 데는 따로 사연이 있었다. 공장 일을 열심히 잘 하기 때문에 나는 그 동안 안내원이나 부사장 몰래 주로 화장실에 가서 천 딸라 씩 줄 때마다 늘 한말이 있다. 잘 모아 두었다가 공장에 쓸 일이 있을 때 쓰고, 혹시 내가 돈이 필요할 때 쓰기 위해 저축 삼아줬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돈을 어디다 다 썼느냐고 물어 볼 수가 없다. 사장과 나와 단 둘 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괜히 내가 속이 상해 한바탕 야단을 쳤지만 옳은 말이니 다 들 고개 숙인 채 듣고 있었다. “내가 이번에 돌아가서 이번 겨울에 신을 운동화 3백 켤레를 사서 보낼 테니 그리 알고 발 사이즈나 알려 주라! 알았나!”

몇 년 전만 해도 1년에 두 번씩 신발 배급이 나왔는데 이제는 각자가 해결을 해야 하니 먹는 것이 바빠 신발은 뒷전이란다. 아이들도 새 신발 한번 사 주려면 너무나도 어렵다고 한다. 비참한 현실이다. 점심은 이들 모두 아예 굶는다.

평양 주민이 점심을 굶고 있었다

우리네들도 50-60년대에 점심은 많이 굶었다. 그래서 평양공장에 갈 적마다 빈손으로 간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철 따라 필요한 생활필수품인 빨래비누, 사카린, 설탕, 천재지변으로 배급이 끊기고 먹을 것이 없을 때는 공장 밴 트럭을 신의주로 오라고 해 중국에서 값싼(품질이 아주 좋지 않음)밀가루를 잔뜩 실어 보내고, 옥수수기름도 많이 보냈다.

이 물건을 줄 때는 그냥 명분 없이 주지 않고 조 별로 생산량과 품질평가를 형식적으로라도 생산과 관련하여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 양말도 푸짐하게 사 줬다. 내 식구처럼 챙기고 다독거렸다. 이제는 남 같은 마음이 아니고 한 집안 식구처럼 가까운 마음으로 지냈다. 하물며 손톱깎이도 하나씩 나눠주고 봄 겨울용 로션도 선물해주었다.

평양에 있는 동안 우리공장 공원들이 일상생활 하는데 무엇이 꼭 필요한지를 늘 관찰하여 메모 해 뒀다가 다음 방북 때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만은 꼭 사서 어깨가 빠지도록 들고 갔다. 뭐든지 주고 싶고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쉬운 것은 한국처럼 다 함께 회식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떠들며 왁자지껄하게 한바탕 뛰며 놀고도 싶은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놈의 공화국은 사람 사는 맛이 없다. 경직된 분위기에 서로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이웃이 부담스러울 정도다. 내가 나의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고 위대한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에게서 잠시 빌려 간직하고 사는 것 같은 모습이다.

이런 사회인데도 항상 입으로는 “우리는 행복하여라!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만을 부르짖으며 기계처럼 오고 간다. 언제쯤에야 자유스럽고 조금은 인간적으로 흐트러진 삶의 모습을 보려나. 끝도 없이 언제까지, 어디까지 가야 숨통이 터질지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만 같았다. 이럴 생각이 들 때면 우리공장의 공원들을 보면서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미어져 올 때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명선 사장의 피나는 노력으로 웬만한 잡음은 제거하고 제품은 잘 만들어졌다. 그런데 공장에서 남포까지 운반하는 자동차 운임이 너무 비싸니 1톤 밴(봉고형)을 한 대 사달라고 했다. 외화벌이 공장이라고 운반비를 두 배 줘야 해결되는 괴상한 나라다. 그래서 한국에서 차를 한 대 사서 보내주겠다고 했더니 ‘남조선 차는 안 된다’며 방방 뛴다.

▲ 김명선 사장(왼쪽)과 함께 문제(?)의 봉고 벤 트럭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필자가 유일하게 이 차를 활용한 것은 이 기념촬영뿐이다 ⓒ데일리NK

그러면 보낼 수 없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선적하는 데 차질이 있어도 양해해 달라고 반 공갈을 친다. 선적을 미끼로 차를 한 대 보유하려고 작정을 한 이상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사실 운반용 차가 한 대는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였다. 차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 니가타항으로 갔다. 이곳은 북한과 일본을 왕래하는 만경봉호가 출 입항하는 항구이다.

차 소유주는 못타고 국가기관이 제 것인양…

일본 동경소재 근양해운 사장의 소개로 니가타의 북한선박 대리점에 부탁해 쓸만한 중고 밴을 사려고 돌아다녔다. 성능 좋은 중고차를 구매하여 만경봉호 편으로 보낸다고 연락을 하니 차 안에 예비부속과 중고 타이어를 가뜩 채워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대리점의 협조로 부속품과 타이어를 준비했는데 값이 만만찮다. 밴 안에 승용차 타이어가 무려 100개가 들어간다. 이것이 평양가면 돈이 된단다. 원산 세관에는 타이어 한 세트만 주면 통관이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걱정이 됐다. 그래서 영수증이며 기타 서류를 잘 만들어 보냈다.

일본의 비싼 호텔 비와 음식값과 교통비 등등 차 한 대 보내는데 한국에서 새 차 한 대 사서 보내는 경비와 별 차이 없었다. 이제 평양가면 내 차니까 공항에 우리 사장이 직접 마중도 나오고 시내 볼일이 있을 때도 사장과 같이 다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은 좋았다. 그러나 그 차는 나를 위해 공항에 마중 나온 일이 없다. 같이 시내 식당에 가 본 일도 없고, 단 한번 그 차를 타 본적이 없다. 타 볼 기회도 없었지만 아예 그 차는 타지 못하게 했다. 하도 섭섭하여 공장 안에 세워둔 차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은 것뿐이다.

평양을 방문하면 내 차가 있다 해서 마음대로 이용한다든지 자유스럽게 외출할 수가 없다. 그럴 수 있는 사회구조가 아니다. 자신의 자가용을 타고 싶다면 별도의 승용차를(그것도 고급승용차 벤츠 정도 돼야 한다) 구매하여 고정된 운전수에게 경비 일체를 매월 정기적으로 지불해야만 개인 자가용을 운영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차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그런 특혜를 부여하지 않는다.

차 한 대를 사서 회사에 두고 있다고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 관리하는 것처럼 내 차라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출국 후 회사에 두고 올 때는 기관에서 빌려달라면 무조건 줘야 한다. 그래서 고급승용차라야 한다. 그런데 빌려가면 언제 돌려줄지 누구도 모른다. 빌려간 기관에서 돌려 줘야 안다. 그 동안의 연료비도 요구 못한다. 내 돈 주고 샀으니 명목만 소유주일 뿐 사실은 국가기관에서 마음대로 갖다 쓰는 관용 차일 뿐이다.

평균 2개월에 한번씩은 평양을 가게 되는데 갈 때마다 빈손으로 갈 수가 없다. 미국에서 사카린,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속내의와 양말, 장갑 등을 사고, 중국에서 설탕, 치약, 세수 비누와 세탁비누를 산다. 그리고 철 따라 맞는 선물들을 보따리 가득 짊어지고 이산가족들에게 가는 마음으로 열심히 다닌다. 나름대로는 최선의 정을 쏟아 붇고 있는 셈이다.

하도 자주 가니 북경 대사관에서부터 탑승수속직원들은 물론 스튜어디스, 순안공항 출입국 직원들까지 거의 다 알고 지냈다. 그들은 모두 “선생님 또 오십니까? 앓지 않았습니까?”라고 인사를 한다. 그러면 인사 받기도 바쁠 정도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면 마치 내 고향 찾아온 듯한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기에 한 두 달이 지나면 평양에 갈 일도 생기고 또 오라는 연락도 받지만 나 스스로 평양행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한다. 가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평양이 궁금해진다. 마치 마약 중독자처럼 평양중독자 같은 자각 증세를 자주 느낀다.(계속)

김찬구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LA 동국로얄 한의과대학졸업, 미국침구한의사, 중국 국제침구의사.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졸업-북한학 석사. -세계화랑검도 총연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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