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년 납북 KAL기 송환 교섭 이면 외교문서 발견

1969년 12월 대관령 상공에서 대한항공(KAL) 여객기가 납북됐을 때 박정희 정부는 승객과 승무원 51명 전원과 기체의 “무조건 송환”을 요구하다가 미국의 종용으로 이러한 입장을 바꿔 북한이 송환하겠다고 밝힌 39명을 인수하는 데 동의했음을 시사하는 외교문서가 발견됐다.

고정간첩에 납북된 여객기 승객.승무원가운데 39명은 이듬해 2월14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으나 조종사와 여승무원 4명 및 일반 승객 7명 등 11명과 기체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오지 못한 황 원(방송국 PD)씨의 아들 인철(40)씨가 최근 비밀해제된 외교사료가운데서 찾아낸 1970년 1월30일자 주미 대사의 전문엔 “KAL기 승무원 및 승객의 송환문제에 관하여 한국 정부는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는 방침을 바꾸어, 대한적십자사 대표로 하여금 (귀환자들의) 인수증에 서명하게 한다는 데 합의하였다”고 돼 있다.

이 전문은, 주한 미대사가 한국 정부와 협의 결과를 미 국무부에 보고한 것을 당시 국무부 마샬 차관보가 1970년 1월29일 김동조 주미대사에게 설명해준 내용을 김 대사가 외무부에 보고한 것이다.

전문에 따르면, 주한 미대사는 미 국무부에 또 “우선 승무원과 승객이 송환될 것으로 보이며, 그 후에 적절한 경로를 통하여 기체 및 조종사의 송환 교섭을 추진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러한 전문 내용들은 박정희 정부가 북한의 부분송환 제의를 거부하고 모든 승객.승무원과 기체의 즉각 송환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송환의사를 밝힌 사람들만이라도 우선 인수하라는 미국측의 종용을 받고 인수에 합의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특히 KAL기 납북후 열린 군사정전위 비서장회의와 본회의에 관한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유엔사측의 송환 요구와 북측의 군사정전위 소관이 아니라는 주장이 대립해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으로 돼 있으나 북한이 1970년 2월3일 희망 승객의 송환 방침을 발표하기 수일 전에 이미 주한 미대사가 “우선 승무원과 승객이 송환될 것으로” 보인다고 국무부에 보고한 점이 주목된다.

북.미간 송환 문제에 관한 이면 교섭 결과를 갖고 미국측이 한국 정부에 부분 송환을 수용할 것을 설득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박정희 정부는 납북 보름만인 12월26일 신범식 문공부장관의 담화를 통해 “모든 승객.승무원과 화물 및 기체를 즉각” 송환할 것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남북간 대화채널이 전무한 관계로 납북 직후부터 북한과 직접 송환교섭을 벌이지 못하고 미국과 일본 등 우방 및 국제적십자위원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송환 노력을 벌일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군사정전위의 유엔사 대표에 의존했다.

황인철씨는 이 외교문서와 관련, “당시 우리 정부가 미국측의 송환 방안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겠지만, 우리 정부가 겉으로는 반공 궐기대회를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실질적으로는 이면합의를 하면서 전원 송환에 적극 나서지 않은 것을 보여준다”며 “당시 반공 이데올로기 주입에 KAL기 사건이 철저히 이용되고 희생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가족들은 이 문서를 보고 모두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며 “송환 대상 선택을 결과적으로 북한에 맡긴 것 등 정부가 무기력하게 대응한 데 대한 전면적인 규명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이 전문에 따르면, 당시 주한 미대사는 “이번 비서장회의(1970년 2월2일)에서 북괴측으로부터 KAL기 송환문제에 언급이 없는 경우에는 아측에서 이를 제기하겠으며, 이러한 얕은 레벨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는 입장을 견지하겠다”고 국무부에 보고한 것으로 돼 있다.

’얕은 레벨’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설명돼 있지 않으나, 북한과 송환 교섭을 군사정전위 본회의가 아니라 비서장회의에서 해 나간다는 뜻이거나, 승객.승무원 전원과 기체의 단계적 송환을 추진하는 등 요구 강도를 낮추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주한 미대사는 승무원과 승객이 우선 송환되도록 한 뒤 조종사와 기체의 송환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결국 기체는 물론 정.부 조종사와 여승무원 2명 및 승객 7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1969년 여름 닉슨 독트린을 통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방위의 아시아화를 선언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검토에 들어갔으며, 1970년 1월22일 국정연설을 통해서도 대외문제 개입의 축소 방침을 밝히는 등 한반도 정세가 긴장되는 것을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한편 당시 김동조 대사는 전문 말미에서 본국 정부로부터 이 문제에 관해 설명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마샬 차관보로부터 받았으나 “아무런 통고를 받은 바 없는 본직으로선 다만 동 차관보의 설명을 듣는 데 그치는 수밖에 없었”다며 “이러한 사례는 미 국무성에 본국 정부와 당관 사이에 긴밀한 연락이 결여됐다는 인상을 주어 당지에서의 외교활동에 지장을 가져올 것으로도 우려”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보고받은 전문 요약서 표지에 “외무장관에게 지시할 것”이라며 “미국과 깊은 관계가 있는 문제에 대한 일은 주미대사에게 훈령으로 사전에 알려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서명과 함께 부기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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