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첫 해전 통쾌한 승리 ‘백두산함’

선명 ‘백두산’(PC 701함)은 대한민국 해군이 보유한 유일한 전투함이었다. 해군 전 장병과 국민은 강한 화력과 최신 장비로 무장된 전투함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백두산함은 이들의 성금으로 탄생했다. 1950년 4월 10일 진해항에 입항한 백두산함은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국내의 주요 항구를 순방하고 6월 24일 진해항에 귀항했다.


다음날 일요일을 맞아 진해항 제4부두에 정박해 있던 백두산함의 대원들은 오랜 해상생활에서 벗어나 절반 이상이 외출을 한 상태였다. 11시경, 느닷없이 지프를 타고 달려 온 통제부사령관 김성삼(金省三) 대령은 당직사관 김종식 소위에게 명령했다.


“701함장은 통제부사령관으로부터 YMS 512정과 518정을 인수 지휘하여 즉시 동해안으로 출동, 제2정대사령관의 협조아래 해상경비를 강화하고 동시에 적함을 포착하는 대로 격침하라.”


701함장 최용남 중령은 비상소집과 함께 외출 장병의 귀함 지시를 내리고 출동태세를 갖췄다. 외출중인 승조원들이 귀함하는 동안 비상물자를 실은 트럭이 달려오고 군의관과 위생부사관도 승조한 가운데 출항준비가 완료됐다. 통제부사령관에게 출항준비 완료보고를 마치고 YMS 512정과 518정을 지휘해, 진해항을 출항한 시간은 15시였다.


미국에서 어업지도선인 지남호(指南號)를 인수하여 최초로 태평양을 항해했던 최 중령의 지휘아래 대원들은 거친 바다를 헤쳐 나갔다. 19시 30분경, 함교에 있던 대원의 시야에 무엇인가 희미한 물체가 들어왔다. 701함은 최대 속력으로 정체불명의 선박에 접근하며 뒤따르던 512정에도 급속으로 북진할 것을 명령했다. 얼마 후 짙어 가는 노을 속에서도 그 물체는 수평선 위에 검은 점으로 뚜렷이 포착됐다. 상황은 당직사관을 통해 함장인 최 중령에게 보고됐고 보고를 받은 최 중령은 전투배치를 명령했다.


정체불명 선박과의 거리는 약 5마일 정도로 유지했다. 백두산함은 정지신호를 잇달아 보냈으나 반응이 없었다. 거리가 3마일 정도로 좁혀지자 괴선박은 갑자기 동쪽으로 선수를 돌리더니 시꺼먼 연기를 내뿜으며 전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최 중령은 적선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1,000톤 급으로 보이는 적선은 무엇을 실었는지 워터라인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끝없는 수평선만 펼쳐지는 해상에서 추격전은 2시간이나 계속됐다.


백두산함이 위험을 무릅쓰고 더욱 가까이 다가가자 적은 일반상선처럼 항해등을 켜고 항해하며 백두산함의 시선을 속이려했다. 백두산함은 서치라이트를 켜 선박을 살폈다. 선수와 선미에 57㎜포가 백두산함을 향해 있었으며, 갑판에는 수병복을 착용한 정규해군과 육전대로 가득 차 있었다.


701함이 해군본부에 상황을 보고하자 적선을 나포하라는 회신이 곧장 하달됐다. 그러나 영해내로 적선을 유도하는 것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해군본부는 적선을 격침하라는 두 번째 회신을 보내왔다. 26일 0시 30분, 함장으로부터 드디어 전투지시를 받은 포술장 유용림 중위의 우렁찬 사격구령과 함께 주포는 불을 뿜었다. 포탄은 적함의 마스트를 통과해 적함의 좌현 해상에 떨어져 물기둥이 치솟았다.


급작스런 포격을 받은 적함은 급선회를 시도했다. 701함은 거리를 더욱 좁혔다. YMS 518정도 701함의 좌현 후미에서 37㎜포로 사격을 개시하자 적함은 57㎜포와 중·경기관총 등으로 대항해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됐다. “거리 1500, 발사.” 다시금 함체를 박차고 나간 포탄은 보기 좋게 적선의 메인 마스트에 명중했다. 701함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때 적선은 한줄기 광선을 내비치며 701함을 찾기 시작했다. 포술원들은 “호등을 겨눠라”는 최 중령의 지시에 맞춰 이번에는 적선의 신호등을 박살내 버렸다.


적은 도망을 단념했는지 화력을 백두산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바다 위에 아군과 적이 쏘아대는 기관포와 주포의 붉은 예광이 수많은 줄을 긋고 또 그으며 사라져갔다. 마침내 적선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이 기우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이때 무엇가 번쩍였고 701함도 심하게 흔들렸다. 적탄에 701함의 조타실 중앙하부가 명중되었다. 조타수 김창학 삼조는 파편상을 입고도 끝까지 키를 집고 있었으며, 주포전화수 김춘배 삼조도 마찬가지였다. 치열한 포격전이 끝나자 수많은 상륙병을 실은 적함은 뿌연 증기를 내뿜으며 수장되고 있었다.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701함은 이렇게 4시간여의 전투 끝에 6.25전쟁의 첫 해전을 통쾌한 승리로 장식하고 진해로 귀항했다. 함장인 최 중령은 1951년 10월 30일 이 해전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군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8호)을 받는다.


그 공적서는 “함장으로 제반 곤란을 극복하면서 현해탄해전에서 교묘한 작전으로 적 함정을 격침시키는 한편 연합군과의 긴밀한 연락아래 동·서해안 봉쇄작전에서 괄목할 활약으로 이를 성공시켰으며, 나아가 인천상륙작전의 수행에도 기여하였다”고 6.25전쟁 당시의 작전수행 능력과 공헌도를 기술하고 있다.


최용남 중령은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 7월 7일, 해병 대령으로 진급과 동시에 해병학교장으로 전보되어 해병의 주역을 양성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1965년 5월 해병 소장으로 군문을 나선 그는 국가발전을 위해 많은 활동을 펼치다, 1998년 11월 26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현재 대전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89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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