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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람들 10명을 모아놓고 “남한(남조선) 사람 가운데 아는 이름을 각자 3명씩 적어보라”고 하자.
그러면 그들 모두의 명단(名單)에 약속이나 한 듯 동일한 인물 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아마 백 명, 천 명을 모아놓고 이러한 조사를 한대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람의 이름은 ‘임수경’이다.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인터뷰해도 북한 주민들이 십중팔구 빠뜨리지 않고 하는 질문은 “임수경은 잘 있느냐”이다. 임수경의 이름 앞에 ‘통일의 꽃’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1989년 당시 임수경을 밀입북(密入北)시켰던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 그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북한이 민주화되고 나면 임수경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을 것이다. 임수경은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세계의 실정을 알게 만든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북한 정권도 의도하지 않은 바였다.
北주민들 임수경 가족을 보고 ‘충격’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남한의 88올림픽에 대응하기 위해 북한이 무리하게 끌어들인 행사였다. 그 행사 이후 북한은 급격히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 행사에 임수경을 ‘들러리’이자 ‘체제선전용’으로 끌어들였던 것인데, 북한 주민들은 임수경의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면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임수경이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가던 날, 북한 주민들은 임수경이 분계선을 넘자마자 ‘미제침략자’의 기관총에 맞아 죽을 줄 알고 전국이 눈물바다가 되었는데, 북한의 상식대로라면 몽둥이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가야 맞는데 당당히 구호를 외치며 넘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듬해인 1990년 12월. 제3차 남북고위급 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에 온 북한 기자들이 남측의 동의 없이 임수경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살림살이가 번드르르 한데다 북한에서는 평양학생소년궁전 같은 곳에나 있을 피아노와 컴퓨터가 떡 하니 놓여있는 것을 보고 또 한번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풍경이 북한 TV에 잠시 방영되었다가 주민들이 색다른(?) 반응을 보이자 북한 당국은 황급히 보도를 중단했다.
북한의 상식대로라면 반역자(反逆者)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까지 줄줄이 수용소에 끌려갔어야 맞는데 버젓이 살아있는 것이다. 게다가 임수경의 어머니는 옥살이를 하고 있는 자식을 둔 어머니답지 않게 환한 표정인데다 행동에 가식이 없어 보였다. 북한 기자들이 남측 경호요원들을 따돌리고 ‘불시에’ 찾아갔는데도 말이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충격’ 자체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 체제불만의 노래
▲ 판문점에서 끌려가는 임수경 |
그 뒤 북한 당국은 임수경의 소식을 주민들에게 전해주지 않고 있다. 임수경은 2001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남측 대표단으로 참석했지만 그녀의 존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다수의 북한 주민들은 임수경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 줄 안다. 임수경의 안부를 묻는 탈북자들에게 “3년 5개월의 옥살이를 한 후 출소했다”고 말하면 깜짝 놀란다. 어떻게 3년 5개월밖에 갇혀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출소 후 임수경 씨가 월간지 객원기자로 활동했고, 대학 강단에도 잠깐 섰고, 최근에는 ‘방송위원회’라는 국가기관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해주면 더욱 크게 놀란다. 북한에서 전과(前科)가 있는 사람이 이렇게 활발한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듯 북한 당국의 의도와는 다르게 임수경은 북한 주민들이 남한 사회를 바라보게 만드는 창(窓)의 역할을 해주었다. 임수경이 가고 나서 한참 동안, 임수경이 입고 다녔던 하얀 반팔 티셔츠 차림과 남한식 구호 제창법, 어투 등이 북한에서 유행했는데 이것을 막지 못해 북한 당국이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임수경의 방북 전에 북한 주민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잘 몰랐는데, 방북 이후 어린아이까지 이 노래를 쉴 새 없이 불러대 또한 애를 먹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체제 불만의 마음을 담아 통일을 요구하는 경향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북한 주민들은 삶이 괴로울 때마다 ‘통일되어 이 고통이 어서 빨리 끝났으면’ 하는 뜻으로 비장하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른다.
학생교류 하려면 ‘금강산’ 울타리 벗어나야
지금 금강산에서 ‘6•15 공동선언 실천과 반전평화, 민족공조 실현을 위한 남북대학생 상봉모임’이라는 긴 이름의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남한 대학생 400명과 북한 대학생 100명이 만났다고 한다. 남한의 대학생은 3백만 명에 이르고 북한은 30만 명 정도인 탓도 있긴 하지만, 이왕이면 북한 대학생이 1천 명 정도 올 것이지 왜 고작 100명인지 아쉽다. 남한 대학생도 4-5천 명 정도 모이면 더욱 행사가 풍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장소가 금강산이라는 ‘절해고도(絶海孤島)’가 아니라 북한과 남한 땅 곳곳이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김책공업종합대학 학생 1천 명이 부산대학교로, 부산대학교 학생 1천 명은 평양 김책공대로 가는 것이다.
숙식도 비싼 돈 들여가며 호텔에서 할 것이 아니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것이 어떤가. 내 집에 북녘 친구들을 맞이하겠노라는 홈스테이 지원자들이 줄을 설 것이다. 북한의 가정집에 남한 학생들이 머물기 어렵다면, 부산대 학생들은 김책공대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해도 좋다. 아무튼 기왕에 행사를 하려면 이렇게 ‘우리민족끼리’ 훈훈한 인정이 느껴지도록 해보잔 말이다.
김정일 정권의 운명을 개척해주는 한총련
<한총련> 의장이 ‘개인 자격’으로 지금 금강산 행사에 참석해 있다고 논란이다. 어차피 원칙도 기준도 다 잊어버린 남한 정부이니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
다만 <한총련>에 바란다. <한총련>은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라 자칭한다. 정말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 싶다면 시시껄렁하게 금강산에서 <조선학생위원회>와 끼리끼리 놀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이 수천 수만 명의 교류를 북측에 제안해보라.
분명히 북측이 그 제안을 거절할 것이다. 1989년 ‘임수경의 악몽’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변명의 이유를 둘러대겠지만 말이다.
이것이 <한총련>이 짝사랑하는 북한 정권의 실체이다. 외부의 재채기 만으로도 감기에 전염돼 사망할 수 있는 정권. 그 정권에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한총련>은 ‘민족의 운명’이 아니라 ‘독재정권의 운명’을 개척해주다 결국은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게 될 것이다.
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
한영진 기자(평양출생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