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숙청 ‘심화조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

김일성 사망 이후인 1997년 북한 고위급 인사 2만5천 명이 처형 유배된’심화조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심화조 사건과 관련 전 북한 사회안전성(현 인민보안성) 감찰과 출신 탈북자 박문일 씨는 NK지식인연대 ‘북녘마을’ 최근호에서 “김정일은 정치살인국을 조종한 사실을 감추고 부하들의 맹목적 복종으로 권력을 지켰다”며 “역사는 김정일의 죄악을 계산할 것이며 김정일이야말로 심판대에 올려야 할 가장 큰 범죄자”라고 주장했다.


심화조는 ‘간첩색출’ 명목으로 사회안전성 내에 설치된 기관이다. 심화조에는 사회안정성 요원 8000명이 배정돼 3년간 활동했다. 심화조 활동은 북한 권력사회에 피바람을 불러왔다. 북한판 메카시 사건이자 김정일이 김일성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간첩조작사건이라는 평가가 대체적이다.  


북한은 심화조의 활동이 사정의 도를 넘고 부작용이 극에 달하자 2000년 초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 등과 함께 심화조 간부들을 처형하고 해산시켰다. 


박문일 씨는 기고문에서 “심화조 사건을 지면을 통해 다시 부각시키는 것은 이 사건에 직접 관련된 유일한 탈북자로서 나의 양심선언이기도 하다”며 운을 뗐다.


또한 “심화조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김일성 사망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며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을 운운해 인민의 재산을 수탈한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인민의 마음을 잃어 체제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주장했다.


박 씨가 지식인연대 기관지 ‘북녘마을’에 기고한 심화조에 대한 글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어서 사건의 증거자료로 가치가 높다고 판단된다. 박 씨가 기고한 내용에 따라 심화조 사건을 재구성했다.  


“자신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했던 김정일은 친인척들에게 비료 30t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사회안전성 7교화소에 수감됐던 서관히 중앙당 농업비서를 이용했다.


김정일은 ‘서관히를 남조선간첩으로 매장시킬 것을 극비로 지시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장성택은 리철 중앙당 조직부 사회안전성 담당 책임지도원과 채문덕 사회안전성 정치국장과 함께 이 일을 도모하게 된다.


서관히는 ‘미국과 남조선의 첩자로, 임무를 받고 인민들을 굶어죽이기 위해 체계적으로 농사를 망치게 했다’는 죄목을 받아 평양시민들 앞에서 황금숙과 함께 총살당한다.


황금숙은 김일성으로부터 일 잘하는 관리위원장이란 평가를 받았던 인물로 ‘국가재산 약취죄’로 사회안전성 예심국에 수감됐었다. 과오를 범한 당 간부는 보통 사회안전성 ‘증산 노동단련대’나 ‘교화소’에 보내져 ‘혁명화’를 통해 복직시키는 전례가 많았던 점과 관련 북한의 이와 같은 처벌은 이례적인 일이다.


김정일은 북한의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속편인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제작해 서관히를 진짜 간첩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도 시행했다. 영화는 서관히가 당의 주체농법을 위해 헌신한 과학자의 논문을 말살해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과거 국가안전보위부나 선군정치 이후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의 위세에 눌려 사법권이 무의미했었다. 서관히 간첩사건을 계기로 사회안전성은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부상했다.


김정일은 이후 사회안전성에 심화조를 구성, 김일성 측근을 제거해 절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초석을 다진다.


심화조는 ‘6·25전쟁 때부터 현재까지 잠복해 있던 간첩들을 적발했다’는 이른바 ‘심화조 사건(용성사건)’을 다시 조작한다. ‘심화조 사건’은 총 2단계로 이뤄진다. 1단계는 1996~1998년까지, 2단계는 1998~2000년까지다.


황윤모 사회안전성 참모장, 김운철 주민부부장, 리철 담당지도원, 안용국 총무부 부장 등 사회안전성 간부 15명은 간첩 소탕 명분으로 주민문건에 공백이 있는 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던 김만금 전 중앙농업위원회 위원장은 주민문건요해과정과 용의선상에 선 사람들의 증언으로 간첩으로 몰려 시체가 총탄세례를 받았다. 북한은 훗날 심화조가 거짓으로 판명되자 총살한 자리에 흙을 가져다 애국열사릉에 재안치한다.


‘심화조 사건’은 고위 당국자 외 가족들 또한 공포에 떨게 했다.”


박 씨는 “안전성에 끌려간 할아버지가 잘못될 경우 요덕으로 가야하는 가족과 주민등록문건 상 공백이 있다는 이유로 어린 안전원의 고문에 허위 자백하는 노인 등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1단계 총화로 3,000여 명이 희생됐고, 1만 여명의 연고자와 가족들은 요덕으로 보내졌다.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에서 공적을 세운 채문덕과 윤계수, 최덕성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했다.


심화조의 권력층이었던 장성택과 채문덕은 2차 심화조 요해대상으로 문성술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와 서윤석 전 평양시 당 책임비서를 선택했다.


이들은 개인적인 이유로 장성택과 채문덕의 원한을 샀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유일사상체제와 김정일 계승문제를 책임졌던 문성술은 김정일의 친인척을 감시해 여자와 돈을 좋아하는 장성택의 비행을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서윤석은 한 때 평양시 안전국장이었던 채문덕이 학습을 게을리 한다는 자료를 보고해 김정일이 채문덕을 강직시켜 함흥 분주소장으로 내려 보낸 데 일조했다.


문성술과 서윤석이 받은 고문은 전기와 얼음, 손톱·발톱을 뽑는 것으로 일반 사람과 같았다. 얼굴이 문드러진 문성술은 구류장 벽에 머리를 받아 자살을 했고, 서윤석은 정신이상자가 됐다.


2단계 ‘심화조 사건’으로 4명의 내각상 포함 전국적으로 2,000여 명이 처형됐고, 1만 여명의 가족과 친인척이 수용소에 감금됐다.”


박 씨는 “문성술의 자살은 채문덕에게 최대의 실수이자 심화조의 막을 내리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문성술의 자살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중앙당 조직지도부 4과’를 사회안전성에 파견했다”며 “심화조에서 벌어진 중세기적 고문과 회유, 공갈에 대한 자료를 입수한 김정일은 채문덕이 단독으로 자기의 명의를 도용한 것으로 사건을 정리했다”고 설명했다.


“채문덕, 윤계수, 최덕성의 공화국영웅칭호를 박탈한 김정일은 사회안전성 참모장과 담당 책임지도원 리철, 주민등록국장, 룡성구역 수사과장 등을 반혁명적인 권력야심가로 판결해 15명의 심화조 책임자를 모두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김정일은 인민들의 원한을 수습하기 위해 사회안전성을 인민보안성으로 이름을 바꿨다.”


박 씨는 “25,000여 명의 피해자 중에 죽거나 자살한 사람이 무려 40%나 되니 수용소의 참상을 짐작할 만하다”며 “후에 김정일은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희생자와 가족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벌였지만, 의도와 달리 김정일을 고발하는 성토장으로 변했다”고 설명했다.


‘심화조 사건’ 후 5년이 지난 2005년 4월 북한은 ‘북한 고위 당 간부 학습반’에서 채문덕을 재언급했다. 북한은 현재 요덕정치범 수용소에 수감 중인 그의 실토자료라고 소개하면서 “당과 정부를 뒤집을 쿠데타 목적으로 심화조를 조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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