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역정을 통해 본 장성택의 리더십과 역할

북한의 파워 엘리트 중 장성택 만큼 그 영향력에 대해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는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일부 전문가들은 장성택을 ‘불안정한 2인자’로 간주하는 반면, 다른 전문가들은 장성택이야말로 현재 북한의 실질적인 통치자라고 주장하거나 북한을 김정은과 장성택이 공동통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장성택에 대해 우리 사회에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영향력의 원천과 한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치적 역정에 대해 자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본고는 그의 정치적 부상과 2004년의 직무정지 배경 그리고 2006년의 복권까지의 과정을 고찰하면서 장성택이 김일성 시대와 김정일 시대에 어떠한 역할을 했고 어떻게 ‘제2인자’로 부상하게 되었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장성택은 해방 직후인 1946년 1월 22일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일제강점기시대 김일성과 무관한 계열에서 항일투쟁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성택이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확인하기 어렵다.


김경희와의 결혼으로 초고속 승진


장성택은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재학 중 김일성의 장녀인 같은 과의 김경희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최대 사건이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었던 황장엽은 장성택에 대해 “그 반에서 공부를 특별히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예술서클 책임자로서 아코디언 연주가 일품이었고, 노래와 춤에도 능했으며, 무엇보다도 사리에 밝고 영리했다”고 회고했다. 장성택과 김경희의 연애 소문이 김일성의 귀에 들어가자 김일성은 장성택의 가족관계를 조사토록 했다. 그 결과 장성택의 부친이 김일성과는 무관한 계열에서 항일투쟁을 한 것이 확인되자 김일성은 장성택을 김일성종합대학교에서 출학(黜學)시켜 원산에 있는 경제대학(현 정준택원산경제대학)으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김경희가 원산까지 장성택을 찾아가곤 할 정도로 그를 좋아했고, 아버지 김일성이 집에 들어오면 장성택과 결혼하겠다고 울고불고 하면서 장성택은 김일성종합대학으로 복귀해 졸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성택은 이후 1969년에 김경희와 함께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해서는 평양시당에서 지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장성택은 1972년에 김경희와 결혼하면서 권력의 핵심부인 당중앙위원회의 지도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72년은 김일성의 환갑을 맞이해 당 내에서 김정일을 후계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된 해이다. 장성택은 이후 당중앙위원회 부과장, 과장을 거쳐 1982년에 당중앙위원회 청년사업부 부부장직에 임명되었고, 1985년에는 같은 부서의 제1부부장으로 승진했다. 1986년 11월에는 만 40세의 젊은 나이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1988년에는 청년사업부장으로 다시 승진했다. 북한을 움직이는 100여명의 핵심 파워 엘리트들이 당중앙위원회 위원이고, 이들 바로 밑의 엘리트들이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들인데, 장성택은 1989년 6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89년 7월에는 당중앙위원회 청년 및 3대혁명소조부장을 맡아 김정일에 대한 청년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김정일의 신임으로 무소불위의 권력 행사 


1970년대 후반에 장성택은 당중앙위원회 부과장 또는 과장의 지위밖에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김정일이 그를 신임하면서 그는 이미 이 시기부터 김정일의 ‘피로회복관’ 건설을 주관하는 등 특별과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영향력은 점차 급속도로 성장해 1989년에는 특정 구간의 전기철도화를 위해 필요한 동 20t 조달 문제를 연형묵 총리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장성택이 전화 한 통화로 해결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장성택은 1989년 제13차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의 ‘성공적’ 개최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3차 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하겠다고 김정일이 결정한 때부터 외교부(現 외무성)와 정무원(現 내각)의 해당물자 조달부서에서는 ‘이 축전은 하지 못한다’ ‘쓸데없는 낭비다’라는 의견이 파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장성택이 김정일의 힘으로 내리누르면서 도당 비서들도 장성택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가 되었고, 13차 축전은 막대한 예산 낭비 속에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었다.


장성택은 1990년대 초 평양의 ‘통일거리 건설’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당시 연형묵 총리는 ‘정무원의 힘으로는 통일거리 5만 세대 살림집 건설이 어려우니 4만 세대로 조절하여 줄 것’을 김정일에게 요청했으나 김정일은 이를 거절하고 장성택에게 당의 힘을 동원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장성택의 부름에 인민무력부의 군사장비들까지 떨쳐 나왔고 인민경비대, 국가보위부 관할 특수부대들의 노력 지원으로 건설장은 사람 발 디딜 자리까지 없을 판이 되었다. ‘장 부장 동지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습니다’ 하면 안 나오는 기계나 장비가 없었고, 사회안전부(現 인민 보안부)에서는 백학림 대장 이하 모든 장령들이 건설장에 100%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장성택이 김정일의 특별지시를 집행하면서 장성택의 말은 곧 김정일의 말로 인식되었고, 장성택은 김일성․김정일 다음 가는 위상과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1호 행사(김일성 부자가 참석하는 회의)가 진행되는 경우 모든 간부들은 직급에 관계없이 최소한 30분전에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지만 장성택만은 예외였다. 그는 김일성 부자가 나오기 10분전에 나왔고 먼저 나온 모든 간부들은 그에게 90도로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 간부들이 장성택을 ‘장 부장 동지’라고 부르면서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김정일)를 부를 때만큼이나 존경과 아부의 정을 담아 부르게 되었다. 장성택은 그야말로 김정일의 ‘분신(分身)’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장성택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1991년 콩고 주재 북한 대사인 류관진은 ‘장성택의 사람’으로 외교부 부부장들이나 당중앙위원회 부부장들도 우습게 여기게 될 정도로 장성택 측근들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었고, 장성택에게 줄을 서려는 간부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1992년 12월 장성택은 46세의 젊은 나이에 마침내 당중앙위원회 위원이라는 핵심 파워 엘리트 그룹에도 진입하게 되었다. 이처럼 장성택은 1972년 김경희와의 결혼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지만, 김일성 시대에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나 선전선동부 같은 핵심부서의 고위직을 맡지 못했다. 그것은 김일성이 장성택의 리더십과 정치적 욕망을 경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장성택을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핵심 직책인 ‘당중앙위원회 비서’직에는 절대로 임명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95년 11월 장성택은 당중앙위원회에서도 가장 파워 있는 전문부서인 조직지도부의 제1부부장직에 임명되었다. 1994년 김일성의 사망 후 김정일이 여동생 김경희와 매제 장성택에게 더욱 의존하면서 장성택이 핵심 실세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장성택의 큰형인 장성우도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이라는 주요 직책을 맡고 있다가 1995년 10월 평양 일원 방어를 주임무로 하는 3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장성우는 2002년 4월 군단장으로서는 당시 전재선 1군단장에 이어 두 번째로 차수(원수와 대장 사이)로 승진했는데, 이는 장성택 형제에 대한 김정일의 특별한 신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장성택의 특별한 위상이 한국 인사들에 의해 직접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부터였다. 장성택은 2000년 6월 15일 김정일 총비서가 김대중 대통령을 위해 마련한 오찬에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연형묵 국방위원, 김국태 비서, 김용순 대남 비서, 림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최춘황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함께 참석했다. 당시 손길승 SK 회장은 장성택과 합석했는데 ‘남북경협을 위해 제안할 것이 없느냐’고 물어와 ‘투자보장협정과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장은 ‘그럼 위원장에게 직접 건의하라’며 거의 끌다시피 김 위원장 앞으로 데리고 갔다. 북한에서 김정일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김정일이 있는 헤드 테이블에 직접 가는 것은 당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인 조명록도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었다.


2002년 장성택의 방한은 그의 특별한 지위를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장성택은 2002년 10월 26일 박남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총 18명의 북한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후 8박9일간 지하철, 고속철, 한국도로공사 교통정보센터,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 포항제철소,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고리원자력본부, 김해시의 태광실업, 부산 컨테이너부두, 두산중공업, 마산자유무역지역 관리원, 한국소니전자, 여수남해화학, 광주 엠코테크놀러지, 서울 디지털산업단지, 이레전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대덕단지 내 화학연구원, 직물염색 가공업체 (주)범삼공, 롯데제과, 닭고기 가공업체 마니커,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동대문 쇼핑몰인 ‘두타'(두산타워), 창덕궁, 경복궁, 에버랜드와 롯데월드, 경주 보문관광단지, 제주도 등을 참관했다. 방한 기간 중 장성택은 ‘적국(敵國)’의 숙소에서 거의 매일 저녁 폭탄주를 마셨는데, 이 같은 행동은 장성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함께 방한한 북한 인사들이 마치 김정일을 대하듯이 장성택을 대하는 것도 목격되었다.


‘종파행위’로 인한 직무정지와 복권  


이처럼 김경희와의 결혼 후 고속승진의 길을 걸으며 핵심 실세로 부상하게 된 장성택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있었다. 장성택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은 2003년 7월 초 김정일의 자강도 강계시내 산업시설 및 교육기관 시찰을 수행한 이후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흥미롭게도 장성택이 공식 석상에서 사라진 시점은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가 한국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탈북자․북한인권 문제 토론회’에 참석하여 “김정일 체제가 무너질 경우, 그래도 다음을 이을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장성택이 제일 가깝다”고 지적하고, 장성택이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사방에 자기 사람을 박아놓았다”고 말한 2003년 7월 4일 직후이다. 장성택은 조직지도부의 다른 제1부부장들과 함께 김정일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직책에 있었고, 공안기관 및 사법․검찰기관에 대한 당 생활 및 정책적 지도를 담당해왔다. 또한 당시 장성택의 큰형 장성우가 평양 방어를 책임진 차수 계급의 3군단장이고, 둘째형 장성길도 인민군 중장으로 군단 정치위원이었기 때문에 장성택은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유고시 정권을 장악하기에 가장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 인물로 외부 세계에서 주목받아왔다. 그런데 김정일이 장성택에게 크게 의존하기는 했지만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울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황장엽의 발언 이후 김정일과 고영희는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김정철이나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는데 장애가 될 수 있는 장성택의 영향력을 서둘러 축소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은 공식석상에서 사라진 후 ‘종파(파벌)행위’와 ‘권력남용’ 등으로 당으로부터 집중 검열을 받았다. 북한은 ‘수령’과 ‘수령의 후계자’ 이외의 당 간부 주위에 사람이 모이는 것을 ‘종파행위’로 간주해왔기 때문에 주변에 다수 측근세력을 형성한 장성택이 ‘종파행위’를 해왔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는 그가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이고 김정일이 그에게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일이 환갑이 지남에 따라 후계자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고, 그의 부인 고영희가 유선암으로 사망하기 전에 그녀의 두 아들 중 하나를 후계자로 지명하기 위해 서두르게 됨에 따라 장성택의 ‘종파행위’는 김정일에게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장성택의 직무정지는 그의 측근들 해임 또는 좌천으로 연결되었다. 장성택의 측근 중 최춘황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리광근 무역상, 박명철 체육지도위원장 등은 해임되어 김일성고급당학교에서 재교육을 받거나 농촌으로 추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003년 7월에 임명된 최룡수 인민보안상도 만 1년 만에 해임되었으며, 지재룡 당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도 지방의 노동자로 좌천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장성택 파벌이던 군 장성급 7, 8명도 지휘관 등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약 80여 명의 장성택 계열 고위 간부들을 대상으로 집중 조사가 진행되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장성택의 형 장성우는 2004년 상반기에 평양 방어를 책임진 3군단장직에서 물러나 민간무력을 관장하는 당중앙위원회 민방위부장을 맡게 되었는데, 이는 유사시 장성우가 장성택의 권력 장악을 돕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인사 조치로 해석된다.


장성택은 고영희가 유선암으로 사망한 후인 2006년 1월 28일 국방위원회가 주최한 설 연회에 김정일 총비서와 함께 참석, 정치무대에 복귀하였으며 ‘당중앙위원회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을 맡게 되었다. 장성택이 과거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임명되기 전에 담당했던 역할을 다시 수행하게 된 것이다. 장성택의 복귀에는 김경희의 김정일 설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은 일반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근로단체와 김정일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수도 건설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장성택에게는 개인적으로 불운이 계속 이어졌다. 장성택의 둘째형으로 북한군 중장이던 장성길은 2006년 7월에 사망했고, 그의 외동딸 금송은 8월말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도중 본국 소환장을 받고 고민하다가 음주 후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사망했으며, 장성택도 9월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2007년 10월경 장성택은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으로 승진하면서 2004년 직무정지 당하기 전 조직지도부의 행정 담당 제1부부장으로서 맡았던 업무를 다시 관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장성택은 외형적으로는 과거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지만, ‘종파행위’로 인해 다시 낙마하지 않도록 보다 신중하게 처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2008년 8월 김정일의 뇌혈관계 이상은 장성택에게 김정은의 후계체계 구축을 지원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면서 장성택의 영향력도 다시 커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상세하게 고찰하도록 하겠다.(계속)


※ 『NK비전』의 동의하에 동 월간지 2013년 2월호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의 기고문을 데일리NK 칼럼으로 동시에 게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