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의 열세, 호국의지로 메우다

경기도 의정부는 파주, 연천에서 동두천을 거치거나 철원·김화지역에서 포천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주요 접근로의 관문이 되는 곳이다. 6·25전쟁 중 남하하는 적의 공세에 맞서 이곳에서 격전이 벌어진 것은 물론이다.


6·25 개전 당시 북한군이 남침의 최우선적 도구로 삼았던 소련제 T-34형 전차에 대해 우리 국군은 대응할 만한 장비를 보유하지 못했다. 1950년 6월 25일 04시, 전 전선에서 시작된 북한군의 일제 포격에 아군의 전초 진지는 아수라장이 됐다. 300여 대에 이르는 적 전차의 돌진에 속수무책이었다.


국군 제7사단이 담당하고 있던 동두천 및 포천 정면으로 침공한 북한군 제1군단은 제3사단과 4사단, 그리고 제105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최정예군이었다. 그들은 철원/연천-포천/동두천-의정부 축선을 따라 조기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을 임무로 부여받고 있었다.


반면에 국군 제7사단은 제1연대를 동두천에, 제9연대를 포천 정면에 배치하고 있었으며, 사단 방침에 따라 각 연대는 1개 대대만 38선 경계에 투입하고 2개 대대는 소부대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실상 제7사단은 포천과 동두천 지역에서 거점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포천 정면으로 침공한 북한군 제3사단은 불과 교전 4시간 만에 제9연대의 경계진지를 돌파하고 전차를 앞세운 채 포천에 나타났다. 포천과 동두천 지역에서 제7사단이 이처럼 맥없이 밀려나자 육군본부에서는 서울을 사수하고자 재경지역 부대 및 후방부대를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군은 대전차 장비로 57㎜ 대전차포를 일부 갖고 있었지만 탄약도 소량인데다 운용방법도 미숙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 적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전투기나 전차는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수류탄이나 화염병을 이용한 공격도 궁여지책으로 나온 발상이었으며, 개전 초기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방법이었다.


2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운 적의 맹렬한 공격으로 더 이상의 방어가 불가능해지면서 제3연대는 야음을 이용해 축석령과 금오리 중간의 155고지와 202고지로 후퇴해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 방어선은 의정부는 물론 수도 서울의 방위문제까지 좌우하는 중요한 결전장이었다.


장세풍(蔣世豊) 대위가 지휘하는 제2포대는 적 전차의 유일한 접근로인 도로변에 5문의 포를 배치하고 진지편성을 완료하는 한편 사격준비태세를 갖추었다. 6월 25일 자정 무렵의 상황이었다.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이 그의 참모진을 대동하고 제2포대의 진지 지역을 다녀가자, 26일 03시경 김풍익 소령은 장세풍 대위와 함께 지프차를 타고 축석령 지역을 정찰하면서 고개 너머의 적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축석령 정상에는 포병관측소가 운영되고 있었는데, 관측장교의 보고에 따르면 송우리에서 패퇴한 아군이 지금 철수 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탈진한 병사들이 관측소 옆을 통과하는 것을 보고난 후 진지로 되돌아 온 김풍익 소령은 제2포대장 장세풍 대위와 전포대장(戰砲隊長) 최진식(崔鎭植) 중위를 불렀다.


“우리가 이 금오리 방어선에서 적의 침공을 저지하지 못할 때, 의정부와 더 나아가선 수도 서울의 방어까지 불가능해질 것이오. 이곳에서 우리 임무는 105㎜ 야포로 적의 전차를 격파하는데 있소. 그러니까 우리가 이 방어선에서 적 전차를 얼마나 격파하느냐에 따라서 의정부의 방어 여부도 결정될 것이오. 그래서 나는 이미 죽음으로써 이 방어선을 고수할 것을 결심했소. 그러니 장 대위와 최 중위도 나의 뜻에 따라 주길 바라겠오. 더구나 우리는 군대의 기간인 장교일 뿐 아니라 부대의 핵심이며, 부대의 성패에 전 책임을 지고 있는 지휘관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말이오!” 김 소령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07시경 제2포대 진지에는 관측소로부터 적 전차가 출현했다는 보고와 함께 사격요구가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왔고, 즉시 최 중위의 사격지휘에 의해 제2포대의 포가 불을 뿜었다. 포탄은 그대로 적의 전차에 명중되었다. 그러나 포탄이 명중되었어도 적의 전차는 잠시 뒤뚱거릴 뿐 돌진을 계속했다. 당황한 관측반은 제2포대의 사격을 재촉했다. 포대장 장 대위는 사격으로는 적 전차의 돌진을 저지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마지막으로 ‘모두가 포탄을 하나씩 안고 적 전차에 돌진하자’며 포대원들과 함께 필사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진지는 축석령 하단부 전방이 잘 보이는 급커브길 부근이었다. 장 대위는 포반원들로 하여금 신속하게 포를 방열시킨 후 대대장을 바라봤다. “눈금을 제로에 맞춰라. 포탄장진!”


급커브길에 적의 탱크가 모습을 드러내자 대대장의 사격명령과 함께 선두 전차의 측면에서 불빛이 번쩍하더니 화염을 내뿜었다. 궤도를 파괴당한 적의 탱크는 급회전을 하면서 길 한복판에 주저앉고 말았다. 대전차포도 아닌 일반 야포로 적의 전차를 격파하는데 성공한 김풍익 소령은 제2탄을 장진할 것을 명했고, 장 대위는 재빠른 동작으로 포탄을 장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커브길에서 나타난 적의 2번 전차가 포격을 가해왔다. 굉음과 함께 6번포는 대전차 고폭탄을 품은 채 그대로 폭발해버렸다. 그 순간, 105㎜ 야포는 산산이 부서졌고, 김 소령과 장 대위는 피투성이가 된 채 부서진 포 곁에 쓰러졌다. 적의 2번 전차는 파괴된 전차가 길을 막고 있어 전진이 불가능해지자 다시 커브길을 돌아 후퇴했다. 그렇게 김 소령은 29년간의 삶을 적의 전차와 마감했다.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