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이 하나에 벼르지 닷되”

▲ 80년대 평양의 가정 <사진:조선중앙TV>

북한에 “시누이 하나에 벼르지(벼룩) 닷(다섯) 되”라는 속담이 있다. 결혼여성들에게 시누이라는 존재가 그만큼 괴롭다는 뜻이다. 결혼 전 나는 이 속담의 의미를 몰랐다.

나는 첫사랑과 십 년 간의 열애에 실패하고 죽어도 안 한다던 결혼을 서른네 살에, 그것도 17년이나 연상인 상처(喪妻)한 남자와 첫 결혼을 하였다.

홀어머니에 여동생 셋, 아들 딸린 17년 연상 홀아비와 결혼

결혼이 황금사슬이든 쇠사슬이든 사슬인 줄을 뻔히 아는 내가 이 길을 택한 이유가 있다. 인생의 밑바닥인 10여년 간의 노동현장체험부터 시작하여 북한의 최고 문학기관인 조선작가동맹 시인으로까지 상승을 하자 나는 예측치 못했던 하나의 갈증에 허덕이게 되었다.

인간의 보편적 행복은 어디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오는 목마름이었다. 나는 그 행복은 자신이 원하는 목표 달성이라는 것 외에 달리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꿈처럼 소원하던 조선작가동맹 시인의 월계관을 머리에 쓰자 그것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사변처럼 닥쳐 온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들과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소한 권리의 획득-이것은 그가 무엇을 지향하든 결국엔 달성해내야 할 궁극적 목표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그 미지의 것을 쟁취하기 위해 가시사슬이든 철사슬이든 목에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여 마침 중매들어 온 ‘늙은’ 신랑감과 파격적인 결혼을 거행하였다. 그와 함께 내 몸의 진을 뺄대로 빼버린 십 년여의 ‘평양 월향여성독신자합숙소’의 생활을 청산하였다.

시댁의 ‘시’자만 생각해도 가슴 막혀

문학을 하는 여자에게 있어서 시어머니나 시누이가 주는 의미를 알았더라면 나는 당시의 모험을 그 자리에서 급정지 시켰을 것이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 나는 업신여김 받는 시누이 역할은 맡아본 적 있어도 ‘시누이 하나에 벼르지 닷 되’라고 하는 시누이는 거느려본 경험이 없었다. 즉 시누이는 물론 시어머니에 대한 지식도 결혼을 앞둔 나에겐 완전 백지였다.

내가 모신 시어머니에게 홀며느리는 노예 외에 더도 덜도 아니었다. 며느리인 나에겐 모든 생활을 시어머니에게 투시 당해야 했고, 시어머니가 하는 모든 일에 입을 다물고 귀 막아야 할 일밖에 없었다.

도대체 칠순의 이 노구는 당신의 감정, 당신의 이해관계 외에 어떤 것에도 관심 두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며느리는 당신을 향한 아들의 사랑을 빼앗는 둘도 없는 연적(戀敵)이었다. 그의 최고의 사랑인 아들은 ‘후처를 얻자 감투 벗어지는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엄마 마음 알아주는 딸들에게로 더 향해졌다. 집안에 어쩌다 별식(別食)이 생겨도 아들 먹이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였다. 엄마에 대한 정이 변치 않는 딸네에게로 보내야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 아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메워주는 딸들을 위해서라면 며느리는 물론이고 당신의 사랑인 아들까지 희생시키는 것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는 뱃심이었다.

시어머니는 또한 아들 낳은 공로는 오직 당신만이 이룩한 것인 듯, 세상에 아들은 당신밖에 없는 듯이 며느리 앞에 행세했다. 며느리가 밖에 나가서 시를 쓰는지 땅을 파는지 일절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집안에 먹을 것만 많이많이 끌어들여 식구들 배나 불려주라는 심사였다.

시누이, 나는 시누이가 그렇게 무서운 줄은, ‘시누이 하나에 벼르지 닷 되’라는 속담의 뜻이 무슨 말인가는 시누이 셋을 겪어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지내보니 형님(올케)과 시누이 사이에는 애당초 의사소통의 창구가 닫혀 있었다. 그것이 거의 자연적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리석게도 그 창을 뚫어보려고 헛되이 발버둥친 것이었다.

내가 그 창을 뚫으려고 애쓰면 쓸수록 그 창구는 헤아릴 수 없는 시멘트와 모래, 자갈의 혼합물로 뒤덮여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구멍을 내가던 창구만을 덮는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 부분의 것까지 합해져 내 신체 전체를 매몰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엄청난 사태에 깔려 밤낮으로 신음했다. 심장은 때 없이 부정맥을 일으켰고 가슴엔 큰 풀무가 들어앉은 듯 항상 쿵쿵 방아를 찧었다. 그 증세가 하도 심해 의자에 앉아 있을 수조차 없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시인으로서의 창작생활은 완전히 뒷전이었다.

나는 남편이 나서서 나에게 짓눌려진 이 억압의 무게를 덜어주길 애타게 고대했다. 그러나 그는 이쪽저쪽에 싫은 소리 하기 싫어하는 ‘지상의 양반’이었다. 희생자는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불 보듯 명백해졌다.

나는 나의 숨통을 여지없이 조여드는 이 억압의 대상들을 향해 선전포고를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벼르지 열다섯 되의 시달림 속에 내가 치어 죽을 순 없었다.

남성혈통중심 사고방식, 여성의 고통과 희생 강요

결국 결혼 2년 만에 오빠네 살림살이를 좌지우지 하려들던 세 시누이 간섭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났고,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가정을 파탄으로 내몰아가던 시어머니를 시누이네 집으로 유도해내었다. 나의 그 공로로 해 우리 집은 평양에서 추방되는 시간을 1년쯤은 더 연장시킬 수 있었다.

물론 집안의 우환거리가 다 가셔진 것은 아니었다. 지방대학 졸업하고 평양 배치 받아 온 전처의 아들이 나의 속을 죽도록 썩인 것이었다. 그는 집안의 가장집물을 모조리 내다 팔아 혼자 먹어버렸다. 장사한다며 남의 돈을 모아들여서는 여기저기 써버려 집안을 빚쟁이들의 시달림 속에 들게 하는 등 우리 집이 평양에서 추방되도록 하는 완전한 구실을 형성해 놓았다.

하지만 시누이나 시어머니가 나에게 들씌웠던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부담에 비하면 그가 저지른 행위들은 새 발의 피만큼도 안 되었다. 즉 심장부정맥 일으킬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피맺힌 경험들 탓인지 나는 가족에 대해 항상 이중적인 자신을 발견하고 한동안 혼란을 겪곤 했다. 가족이 부부와 자식에 한정된 경우 나는 환영한다. 가족이 시어머니나 시누이, 삼촌 등과 같이 혈통의 범위에 국한될 때 나는 갑자기 가족의 반항아가 된다.

가족의 범위가 혈통을 위주로 지어질 때 가족의 명분으로부터 오는 모든 부담이 결혼여성의 어깨 위에 고스란히 향해 지게 되는 그 이치를 내 몸으로 깨달은 탓이다.

최진이 前조선작가동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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