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새판짜기’ 시작되나

북핵 기상도에 중대한 기류변화가 일고 있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18일 ‘대화의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 진원지다. 북한과 미국이 서로를 향해 마주 달리던 ‘치킨게임’식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 쪽으로 방향을 트는 양상이다.

이 같은 기류변화는 무엇보다도 북핵 협상의 틀에 대한 논의로 구체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 소식통은 20일 “지금은 본격적인 대화국면을 열기 위한 준비단계”라며 “당분간 협상의 기본 틀을 재정립하는 노력들이 집중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김 위원장이 ‘다자대화’라는 미묘한 표현을 들고 나옴으로써 그동안 북핵 협상의 프레임이었던 6자회담의 틀이 ‘변형’될 가능성에 외교가는 주목하고 있다.

북핵 문제는 사안의 성격상 협상의 형식이 그 내용과 결과를 지배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핵폐기 프로세스의 이행에 ‘구속력’을 확보하고 그에 상응하는 천문학적 대북지원 비용을 서로 분담해야 한다는 상황인식이 6자 라는 다자 협상 틀이 등장한 배경이다.

이에 따라 북핵 이해 당사국들이 어떤 틀과 방식으로 협상을 시작하느냐는 북핵 해법의 향방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는 분석이다.

물론 현재로서는 6자회담 틀의 급작스런 변화를 예견하기는 일러 보인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다자대화’의 의미 자체가 모호한데다 6자회담의 틀을 유지하자는 5자의 컨센서스가 형성돼있기 때문이다.

특히 김 위원장의 언급을 두고 6자회담의 공식복귀를 위한 일종의 ‘수순밟기’로 풀이하는 시각이 있다. 한 관측통은 “6자회담 복귀를 향한 ‘중간단계’의 성격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핵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과거 부시 행정부에서의 ‘6자회담’이 그대로 재연되지는 않을 것이란 분석이 높다.

이미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한 북한의 체면을 적절히 살려줄 필요가 있는데다 나머지 5자 내에서도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 맞게끔 6자회담 방식을 변경해야 한다는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는 관측이다.

특히 오바마 행정부가 부시 행정부의 단계적 접근방식과는 달리 북한의 핵포기와 관계정상화 및 대북지원을 일괄 타결하는 포괄적 접근방식을 택하고 있는 점이 협상 틀 변화의 또 다른 근거다. 한 소식통은 “미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늘 새로운 협상 틀이 등장했다”고 말했다.

중국과 북한의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김 위원장의 ‘숨겨진 조건’도 이와 맞물려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이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대해 현행 6자회담을 대체할 새로운 다자협상 틀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양해를 얻어냈을 것이란 얘기다.

이런 분위기로 볼 때 현재 5자의 컨센서스대로 6자회담의 형식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내용상으로는 유연성을 살리는 ‘변형된 6자회담’으로 북.미간 절충이 시도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 소식통은 “6자회담의 틀 내에서는 양자와 다자의 선후관계를 중심으로 다양한 형식의 탄력적 배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외교가에서는 새로운 협상 틀로 ‘2+6’ 또는 ‘3+6’ 방식이 거론된다. 북핵 문제의 실질적 키를 쥔 북.미 양국 또는 중국을 사이에 둔 북.미.중 회담을 먼저 진행하고 이를 중국의 중재하에 6자회담의 틀로 구현해내는 방식이다.

다만 이는 6자회담이 북.미 양자협상을 추인하는 성격에 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창의적’ 역할이 긴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6자회담의 외연을 확대하는 안도 대두되고 있다. 특히 현행 6자 이외에 몽골을 새로운 멤버로 편입시키는 방식이 제기된다. 프랭크 자누지 미 상원 외교위원회 전문위원은 최근 “몽골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해 볼만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소수론이지만 7자, 8자, 9자회담으로 하자는 주장도 있다.

반대로 북한이 외연을 축소해 ‘3자’ 또는 ‘4자회담’으로 하자고 주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보수적 성향의 한국이나 납치자 문제가 걸린 일본을 배제하려는 의도이지만 실현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르면 내달말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북.미 대화에서는 이 같은 협상의 틀을 둘러싸고 북.미간에 치열한 샅바싸움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주목할 점은 이 같은 협상재개 국면에서 한국이 한반도 문제의 최대 당사자로서 어떤 이니셔티브와 역할을 확보하느냐이다.

현재 우리 정부의 입장은 신중론 속에서 제재우위의 압박기조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합의와 파기를 되풀이해온 북한의 협상행태를 충분히 ‘학습’한 정부로서는 북한의 언동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가시적 태도변화가 나올 때까지 압박을 가속화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중재역’을 톡톡히 해낸 중국이 김 위원장의 언급을 “긍정적 신호”라고 평가하고 미국은 외견상의 신중론 속에서도 양자대화를 고리로 본격적인 협상국면을 준비하는 움직임과 비견되는 흐름이다.

문제는 대화국면이 재개될 경우 제재의 동력이 현실적으로 약화할 가능성이 있는 점이다. 이에 따라 정부의 이 같은 전략이 스스로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쪽으로 작용할 수 있고 자칫 과거 김영삼 정부때처럼 외교적 소외를 자초할 소지도 없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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