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는 자선사업가가 있다? 없다?

북한에는 자선사업가가 있을까,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없다.


북한에도 예전에는 남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大)아사 사태가 벌어졌던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 당국의 ‘비사회주의’ 검열이 강화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남을 위한 ‘자선’이 오히려 ‘죽음’으로 돌아온다는 ‘공포’가 확산됐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999년 양강도 대오천에서 벌어진 ‘이종화 공개처형’ 사건을 들 수 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당시 접경지역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중국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살아남기 위한 밀수도 성행했다. 이에 따라 북한 당국은 양강도를 비롯한 접경지역에 대규모 ‘비사회주의 검열’을 실시했다.


이종화 씨도 당국의 검열에 적발됐다. 당시 북한 당국은 이 씨에 대해 “캐나다에 있는 친척에게서 돈을 받으려고 국경을 넘나들면서 간첩활동을 했으며, 공화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현대판 지주’로 집에 머슴을 두었다”고 죄명을 밝히고, 5월 29일 공개처형했다. 


이에 대해 대오천 근처에 살던 탈북자 박봉선 씨는 “김정일의 지시로 된 검열이어서 검열성원들은 ‘실적 쌓기’에 혈안이 돼 날쳤다”며 “검열대는 그가 남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주라는 ‘죄’를 씌워 총살했다”고 회고했다.


보위부원 출신 한 탈북자도 “검열로 피해를 본 주민들이 많았지만 대오천 이종화 사건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며 “그는 자선가로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마을 사람들의 아픔도 헤아릴 줄 아는 좋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었다”고 말했다.


박 씨에 따르면 당국이 ‘현대판 지주’의 근거로 내세운 ‘머슴’은 사실 이 씨의 먼 친척이었다. 굶주림에 남편과 자식을 잃고 ‘꽃제비’로 생활하던 그를 안타깝게 여긴 이 씨의 부인이 데려와 함께 살면서 농사를 같이 지었다는 것이다.


그가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 간첩활동을 하려면 오히려 외부와 연락이 잘되고 혜산시나 보천군 등에 거주해야 하는데 대오천은 차도 잘 들어가지 않는 산골이다. 평시 그는 농사일로 외부에 나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전언이다.


그랬던 이 씨가 검열을 받게 된 동기는 한 마을에 살던 한 주민의 고발로 시작됐다. 평소 그의 재산을 부러워했던 그 주민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덜 생각해 준다는 생각에 검열대에 신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그는 이 씨가 공개처형 당한 후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양강도 출신 탈북자들에 따르면 이 씨는 전형적인 농사꾼이었다. 그는 평시 남보다 빨리 일어나 날이 저물도록 밭일을 하고, 돼지 등 가축을 키우는데 온힘을 다했다. 방치된 땅을 개간해 옥수수와 감자를 심었고, 수확물들은 굶주리는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명절이면 마을사람들에게 과일 등을 선물했고, 가난 때문에 결혼식도 제대로 치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도와줬다. 이 때문에 마을 주민들을 비롯해 양강도 전역에 그의 인간됨됨이가 회자됐었다.


이런 이유로 이 씨의 공개총살에 많은 이들이 가슴아파했다고 탈북자들은 회고했다. 더불어 이 사건 이후 김정일 체제에 대한 공포도 확산됐다.


이처럼 당국의 무분별한 통제조치로 인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는 북한 주민들은 부지기수다. 남에게 베풀고 싶어도 당국의 처벌이 두려워 옆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을 마냥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북한의 현실이다.

소셜공유
강미진 기자
경제학 전공 mjkang@uni-medi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