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이 결핍된 어린시절

▲유년기 김정일 출처:김정일 문헌

모정이 결핍된 어린 시절
(김정일의 유년시절에 대한 다음의 기록은 많은 부분 김일성의 처가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던 박일환(가명)씨를 비롯한 고위층과 교수 출신 탈북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했다.)

김정일에게는 바로 밑에 남동생이 하나 더 있었다. 그의 이름은 ‘슈라’다. 우리식 이름이 ‘만일’(萬一)인 그는 1944년생이다. 슈라는 1947년 여름 평양의 김일성 관저 연못에서 김정일과 함께 놀다 익사했다. 연못의 중간은 네 살 바기가 놀기에는 제법 깊었다고 한다.

만일(슈라)에 이어 태어난 동생이 김경희(金敬姬)다. 2004년 12월 현재 노동당 중앙위 경공업부장을 맡고 있는 그녀는 김정일의 유일한 친동생이다. 김경희는 해방 후 김일성 가족이 귀국한 뒤 태어났다. 김정일은 김경희를 끔찍이 여겨왔다. 김경희는 당 간부로서 별다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도 지금까지 권력의 온실에 남아있다. 현재 김경희는 대외활동을 하기 힘들 정도로 알콜중독 현상이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남편이 얼마 전까지 김정일의 핵심 실세이자 사실상 제2인자라고 할 수 있었던 장성택(張成澤)이다. 최근 들어 장성택은 후계구도의 걸림돌로 분류되어 실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11월 어머니 김정숙을 따라 귀국한 김정일은 고위간부 자녀들을 위해 특별히 세워진 남산유치원에 입학했다. 김정일의 소꿉친구였던 카자흐스탄 거주 교포인 이(李)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교수(카자흐스탄 국립철도대)는 김정일이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다고 말한다. 이교수는 한국을 방문해 어린 시절 김정일과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1949년 6월 김정일은 남산인민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 어머니 김정숙이 세상을 떠났다. 김정일이 여덟 살 때다. 김정숙은 49년 9월 22일 자궁외 임신으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의 <정치사전>에 따르면 김정숙은 1919년 12월 24일 함북 회령 출생이다. 다섯 살 때 간도로 이사 갔다가 부모형제와 사별했다. 김정숙은 35년 열 여섯 살 때 김일성 빨치산부대에 들어가 밥 짓고 빨래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일설에 따르면 김일성과 같이 활동했던 빨치산 1세대 최현(崔賢)이 김정숙과 맺어지도록 김일성의 ‘등을 떼민’ 것으로 전해진다.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총을 잘 쏘았던 김정숙은 김일성의 생명을 구해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글을 깨우치지 못한 문맹자였고, 여성다운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숙은 서른 두 살에 사망했다. 김정숙이 일찍 사망하자 김정일은 죽은 어머니에 대한 유별난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이밖에 김정숙의 죽음은 어린 김정일에게 적지 않은 정서적 영향을 미친다. 김정일은 후일 오로지 ‘어머니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성혜림과 비정상적인 관계를 갖기도 한다. 김정일이 다섯 살이나 연상이었던 여배우 성혜림에게 빠져든 것도 주위에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읜 탓에서 찾고 있다.

어린 김정일을 많이 돌봐주었던 사람들은 빨치산 1세대 가족들이었다. 특히 1997년 2월 사망한 전 인민무력부장 최광의 아내 김옥순과 조선혁명박물관장으로 있는 황순희, 그리고 김일성의 외육촌 동생인 강연실 등이 김정일을 보살펴 주었다.

김정일은 훗날까지도 김일성 직계의 빨치산 가족들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빨치산 출신 가족 우대정책 때문에 1980년대 북한에서는 “우리 조상들은 왜 쪽바가지 차고 만주 땅에 가지 못했을까”하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남침을 감행했다. 김일성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전쟁 지휘에 나섰고, 김정일 남매는 친척집에 있게 됐다. 전쟁이 불리해지고 인민군이 후퇴하게 되자, 김정일은 숙부 김영주의 손에 이끌려 만주 길림으로 들어갔다.

1950년 10월 만주 길림학원에 들어간 그는 2년 간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했다. 1952년 11월 전선이 고착되자 김정일은 후방에 있던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만경대혁명학원’의 전신)을 잠시 다녔다. 전쟁이 끝난 후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삼석인민학교를 거쳐 1954년 8월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했다.

김정일이 계모 김성애와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은 인민학교 졸업 무렵이다. 김성애(金聖愛)는 전쟁 직전 김일성을 만났다. 1928년 평남 강서군에서 농사꾼의 장녀로 태어난 김성애는 중학교를 마치고 한국전쟁 직전 인민군에 입대하여 김일성 집무실 서기로 일했다. 군 계급은 특무상사였다. 젊은 시절 김성애는 얼굴이 예쁜 편이었고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김일성은 김성애에게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얻었다. 평일, 영일, 경진이다. 장모 고씨가 후덕한 성품이어서 정일과 이복형제들은 어린 시절 친형제처럼 잘 지냈다. 청소년 시절 김정일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 평일에게 곧잘 농담도 했다. 김정일은 자기보다 덩치가 크고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해서 농담 삼아 “어이, 평일이 형” 하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954년생인 김평일은 1994년부터 핀란드 대사로 나가 있다가 1998년에 폴란드 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김평일의 외모는 아버지 김일성을 꼭 닮았다. 주변에서는 “젊은 김일성을 보는 듯하다”고 말한다. 덩치는 김일성이 젊었을 때보다 더 큰 편이다. 키 178cm, 체중은 80kg 내외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공인된 후 평일, 영일, 경진 등을 ‘곁가지’로 분류하고, 이들을 쳐내기 시작한다. 북한 권부에서 ‘원가지’ ‘곁가지’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거론된 것은 80년대부터다. 지금 북한에서 이 용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The DailyNK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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