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웨이’ 탈북여성 버스기사 유금단씨

“‘시민의 발’이 된 게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말못할 고생을 했지만 그 고생이 큰 행운이 돼 돌아올 것으로 믿습니다.”

키 150㎝에 커다란 시내버스를 모는 유금단(38)씨는 시내버스 운전을 ‘천직’이자 ‘멋있는 일’로 생각한다는 새터민 출신의 여성.

유씨는 현재 중견 운수업체인 서울 풍양운수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의 모습은 “피나는 노력의 대가”라는 그의 말처럼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필설로 다하기 힘든 고생을 겪었다.

2002년 6월 남한으로 넘어온 유씨는 어느날 문득 ‘시민의 발’ 노릇을 하는 버스기사를 보고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03년 2종 승용차 면허를 딴 유씨는 1종 시험에 도전해 12번 떨어진 끝에 13번째만인 2006년 3월 꿈에 그리던 1종에 합격했다. 이어 그해 7월 지방의 한 운수업체 입사에도 성공했다.

그는 첫 직장에서 1년가량 일하다 회사를 옮겨 경기도의 한 운수회사에서 석달간 버스를 몰았고 다시 올 3월 지금의 직장에 어렵게 입사했다.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게 꿈이었던 그는 입사 전에 지금의 직장과 다른 업체들에도 지원서를 냈지만 모두 떨어졌다.

그 때 새터민으로서 좌절과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는 유씨.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다. 아니, 절망할 여유조차 없었다.

북한에서 진폐증에 걸려 남한에 와서도 치료를 받고 있는 남편의 수발에 중학교 3학년인 아들의 뒷바라지까지 해야 하는 유씨에게 절망은 ‘사치’와도 같았다.

다행히 운명의 여신도 그의 편이었다. 그의 지원서를 눈여겨 봤던 풍양운수 회장과 사장 등이 북한에서 내려와 열심히 일하는 그의 모습을 높이 산 덕분에 두번째 면접에서 취직에 성공했다.

입사 후에도 처음 석달정도는 적응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회사에서 키가 가장 작은 데다 여성인 탓에 남성 위주의 ‘버스기사 사회’에서 실력으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던 것.

몸집이 작고 다리도 짧은 그녀가 운전대를 잡고 있노라면 짓궂은 손님들이 “고등학생이 운전한다”고 놀리기도 했다.

텃세와 편견속에 눈물이 났지만 속으로 삼켰다.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다”는 생각 뿐이었다.

유씨의 남편은 유씨의 탈북전 북한 당국에 누명을 쓰고 붙잡혀 가는 바람에 몇년간 생사를 몰랐으나 2005년 초 탈북, 남한에서 부부 상봉을 할 수 있었다. 아들도 2005년 10월께 홀로 탈북, 10년만에 한가족이 남한에서 재회를 이뤘다.

유씨는 “남한에서 적응하고 산다는 것은 ‘사잣밥’ 같은 생활”이라며 “오직 앞만 보고, 밑바닥부터 극복해 가면서 참아냈다”고 말했다.

지금은 회사 동료들과도 친해져 동료들의 위로와 격려가 큰 힘이 된다.

그는 “회사는 나를 받아줬고, 친자식.형제처럼 대해줬다. 이 곳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1일 2교대인 탓에 새벽에 출근할 때는 오전 3시30분에 일어나 일터로 나가는 힘든 생활이지만 운전대만 잡으면 신이 난다는 유씨.

힘들다고 느껴질 때면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트로트 ‘마이 웨이’를 즐겨 부른다.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내가 가야하는 이 길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번 더 부딪혀보는 거야…”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진 덕분에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멋진 동료로 인정받은 유씨는 얼마 전에는 회사와 동료들의 추천으로 한 기업체로부터 ‘2008 환경대상’의 ‘칭찬합시다’ 부문상도 받았다.

유씨에게 남은 걱정이 있다면 힘겹게 투병중인 남편의 병원비 해결. 가정 형편상 대형병원 입원치료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탈북자에 대해 나쁜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안타깝다. 탈북자 중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 더 많다”며 “무조건 매도하거나 비난하기 보다는 격려를 해 줘야 그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탈북자들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남한 사람들이 나를 보면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 만큼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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