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인종화해의

(조선일보 2006-01-10)
어느 나라든 계층 간 갈등이 있지만, 남아공처럼 극적인 갈등 요소를 고루 갖춘 나라는 없을 것이다. 가난한 다수 흑인과 잘사는 소수 백인. 300년간 백인은 줄곧 탄압자였고, 흑인은 착취만 당했다. 그런 피해자 흑인이 정권을 쥐었으니 다수(인구의 80%)의 힘으로 강제적 평등을 이룰 법도 했다.

그러나 1994년 출범한 흑인 정권은 백인 기득권을 빼앗지도, 징벌적 과거 추적에 나서지도 않았다. 대신 내놓은 국가비전이 의미심장하다. ‘무지개 국가(Rainbow Nation)’. 흑인은 용서하고 백인은 협조하는 화해의 사회계약을 통해 전체 이익을 극대화하자는 &+(창조적 공존)의 선택이었다.

◆ 실용주의의 엔진

1990년 2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범 넬슨 만델라가 27년 만에 석방됐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백인 응징을 외치는 흑인 청년들 앞에서 역사적 연설을 한다. “당신들의 무기를 바다에 버려라.”

운집한 청중은 8만여 명. 유명한 케이프타운 연설이었다. 대하(大河)드라마같이 펼쳐졌던 남아공의 인종 화해는 이 연설이 기폭제가 됐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만델라의 화해론은 도덕적 결단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실용적 선택이기도 했다”(시민단체 IDASA의 폴 그라함 이사)고 남아공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90년대 초, 백인 정권의 항복선언(인종분리정책 폐지)으로 조성된 남아공의 ‘흑인 해방공간’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많은 흑인, 특히 젊은층은 민중봉기를 통한 ‘혁명’을 원했다. 백인 가해자에게 보복하고, 빼앗긴 흑인 몫을 찾아와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이런 분위기를 뒤집은 것은 ‘사실(fact)의 힘’이었다. 백인은 여전히 군과 경찰을 장악하고 있었다. 두 인종이 충돌하면 엄청난 유혈사태로 번질 위험성이 높았다.

만델라와 투투 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흑인 지도자들은 이런 사실을 들어가며 흑인들을 설득했다. 게다가 흑인에겐 훈련된 인재풀도, 경제력도 없었다. 국가운영을 하려면 백인의 돈과 노하우가 필요했다.

흑인 지도자들은 이런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시킴으로써 흑인 민중을 ‘화해 코스’에 동의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대화의 힘

남아공은 지구상에서 최후(1991년)까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이 유지된 나라다. 인구 10%의 소수 백인이 부(富)와 권력을 독점하며 고문·납치·살인으로 흑인 해방운동을 탄압해왔다. 그런 흑·백이 과거를 뛰어넘어 손잡은 것은 극적이다 못해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끈질긴 대화뿐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만델라와 데 클라르크(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한 마지막 백인 대통령) 간 대화 채널 이후 흑·백 양쪽은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푼다는 전통을 세웠다. 협상에 시한을 두지 않고, 시간이 걸려도 모든 당사자가 합의할 때까지 협상을 계속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그래서 남아공의 의사결정을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린 경우가 많다. 흑인 정권이 출범한 후 3년이 지나서야 신(新)헌법이 만들어졌고, 거기서 또 2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과거 문제를 다루기 위한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일단 합의가 이뤄지면 누구도 깨지 않았다. 판을 깨면 서로에게 손해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의 성공 경험이 축적되면서 흑인은 백인의 기득권을 존중하고, 백인은 국가운영에 협조한다는 암묵적 사회계약이 형성됐다.

◆진실과 화해

모든 것에 우선하는 남아공의 최고 가치는 ‘사회(체제) 안정’이다. 과거사 진상을 밝히기 위해 1998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에도 어김없이 이 원칙이 적용됐다. 어렵게 이룬 사회안정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과거 문제를 풀어나간다는 원칙이 일관되게 유지됐다.

그래서 나온 해법이 ‘진실을 밝히는 가해자는 용서한다’는 것이었다. 4년간의 조사활동을 통해 가해 사실을 고백한 약 1000명에게 면죄부(사면·amnesty)가 주어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또한 백인뿐 아니라 흑인 쪽의 반(反)인권 행위도 조사 대상에 넣었다. 만델라가 이끄는 집권 여당(ANC) 지도자까지 조사하기도 했다. 패자(백인)에 대한 승자(흑인)의 징벌이 아니라, 공평한 진실 규명이었기 때문에 양쪽 다 납득할 수 있었다.

불가사의한 것은 사면받은 가해자에 대한 보복이 없었다는 것이다. 피해자측은 자기를 가해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개별적인 보복 사태는 한 건도 벌어지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의 17인 위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한 야스민 수카씨는 “흑인들은 용서를 통해 정치적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데 만족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흑인 정권은 백인정권 시절 흑인을 탄압한 군(軍) 정보담당 간부 출신까지 각료(샬퀴크 환경장관)로 기용했다. 화해함으로써 백인들 협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흑인들은 알고 있었다.

◆ 짐바브웨라는 반면교사(反面敎師)

짐바브웨와 이웃한 것도 남아공에게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짐바브웨 흑인 정권은 90년대 후반부터 백인 토지를 빼앗아 흑인에게 나눠주는 등 ‘대결의 길’을 선택했다.

흑인 대중은 열광했으나 곧 부작용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우수한 백인 인재가 나라를 떠나고 외국자본이 외면하면서 경제가 쪼그라드는 마이너스 성장의 덫에 걸렸으며, 물가폭등과 고실업이 찾아왔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남아공으로선 해답이 너무도 분명했다. 남아공 사람들은 누구나 ‘짐바브웨 코스’를 예로 들며 “실용주의뿐”(스탠다드차타드은행 윌리엄 예이츠 매니저)이라고 입을 모았다.

짐바브웨와 대조적으로 남아공은 4~5%의 안정적 성장을 이어가고 있고 세계의 신흥 성장경제로 떠올랐다. 창조적 공존 전략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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