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史와 ‘쌀’지원 함수

“쌀은 남북관계를 여는 촉매제, 관계가 경색될 때는 완화제, 관계가 잘 나갈 때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남북문제에 정통한 한 전직 고위관료는 남북 분단구조 속에서 양측 주민의 주식인 ‘쌀’이 해온 역할을 이렇게 정리했다.

쌀의 이러한 역할은 ‘식량’이 가지는 인도주의와 전략적 도구라는 이중적 성격 때문이다. 받는 입장에서는 ‘인도주의’ 포장으로 체면 손상을 막을 수 있고, 주는 입장에서는 전략적으로 대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쌀이 남북관계에 처음 등장한 때는 1984년.

9월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도 1천300억원이 넘는 수재가 발생하자 북한은 9월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7천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지원을 제안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년전 미얀마에서 북한이 저지른 아웅산묘소 폭파 암살 시도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제안을 전격 수용했다.

북측은 제안을 하면서도 남측에서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생색내기’로, 남측은 북측의 생색내기에 대한 ‘골탕먹이기’로 생각한 측면도 많았었다.

어쨌든 당시 북측의 식량지원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본회담을 가진 데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실현시켰고 남북간 최초의 경제회담도 시작했다.

또 1985년에는 허담 노동당 비서의 서울 방문 및 대통령 면담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원칙적 합의가 이뤄졌고, 장세동 안기부장과 박철언 특보, 안기부 연구실장이었던 강재섭 현 한나라당 대표의 밀사 방북이 성사돼 김일성 주석을 면담하는 등 남북관계가 발빠르게 전개됐다.

인도주의로 포장된 북측의 전략적 제안이었던 식량지원을 남측이 수용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물꼬를 튼 것이다.

대북 식량차관의 시작이었던 2000년 첫 식량차관 제공은 남북관계의 촉진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지 얼마되지 않아 제주도에서 개최된 제3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식량차관 지원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고 그 이후 매년 정기적으로 북한에 쌀차관이 제공됐다.

`봄 비료-여름 식량지원’이 정례화되면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14차례 이어져 총 1만6천347명의 이산가족이 반세기만에 가족들과 만났고 납북자와 국군포로 32가족 136명도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었다.

한 대북 전문가는 “쌀차관 제공 등 인도주의적 지원은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인도적 문제와 연계됐지만, 그 여파는 개성공단이나 남북간 철도.도로 연결 등 경제협력 사업의 진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의 시발점이나 촉진제 역할을 해온 쌀은 경색된 남북관계를 푸는 열쇠로서도 크게 기능해 왔다.

2006년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그에 따른 유엔의 대북 제재결의 와중에 당시 노무현 정부가 북한에 대한 쌀과 비료 지원 논의를 유보하자 북한이 반발하면서 남북관계가 크게 경색됐다.

그러나 당시 북측에서 큰 수해가 나자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대한적십자사와 민간의 긴급구호와 수해복구 지원에 참여키로 결정하고 각종 복구용 자재 장비와 더불어 10만t의 쌀을 북한에 지원했다.

뒤 이은 북한의 10월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2.13합의 등 북미관계의 진전과 더불어 남북이 장관급회담을 재개하고 10월엔 정상회담을 개최할 수 있었던 데는 북측의 재난상황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남북간 신뢰가 한몫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쌀지원이 무조건 남북관계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치밀한 대북 로드맵과 그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 정책을 마련해 식량지원 문제에 접근하지 않으면 오히려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5년 김영삼 정부 때의 대북 식량지원.

북한에서 대량 아사자가 발생한 이른바 ‘고난의 행군’ 출발점이었던 1994년 10월 북미회담을 통해 제네바 합의가 이뤄지진 뒤 북한은 1995년 5월 자민당 소속 의원들을 통해 일본에 식량지원을 요청했고 일본 정부도 화답했다.

북미간, 북일간 이러한 급속한 접근 움직임에 북한 문제에서 소외될 상황에 직면한 김영삼 정부는 북측과 식량지원 협의에 나서려 했지만, 북한은 ‘통민봉관(通民封官)’ 전략에 따라 당국간 협의를 거부했고, 결국 민간 성격의 코트라(KOTRA)의 비선을 통한 남북 접촉을 통해 15만t의 쌀 지원이 합의됐다.

수동적으로 상황에 쫓겨 만들어진 남북간 합의는 졸속으로 이뤄질 수 밖에 없어, 인공기 게양으로 문제가 됐던 `시아펙스’호 사건, ‘정탐행위’ 논란이 일었던 `삼선 비너스’호 억류 사건 등이 잇따랐고 당시 정부는 북측에 사과문 등을 보내고서야 15만t의 쌀을 북한에 전달할 수 있었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의 가동기록을 미국에 전달하는 등 핵문제가 급진전 가능성을 보이고 미국의 대북 50만t 식량지원 계획도 곧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도 지난 수개월간의 대북 식량지원에 관해 소극적 입장을 지원 쪽으로 바꿔나가자 1995년 상황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 대북 전문가는 “북한에 식량을 국제기구를 통해 지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어렵더라도 북한에 대화 재개를 제안하고 이를 통해 직접 지원으로 남북간 신뢰를 복원해 남북관계를 다시 공고하게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고 남북 당국간 각종 회담을 개최함으로써 북미관계 진전에 남북관계의 속도를 맞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 전문가는 “3박4일간의 평양체류 기간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자루를 들고 다니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5차례 이상 목격했다”며 “북한 주민들의 대남 적개심을 약화시키고 장기적으로는 남한에 대한 북측의 동포애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기구를 통해 지원되는 식량에는 대한민국에서 지원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시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직접 지원을 통해 지원의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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