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남순(南巡)답사와 ’10·4선언’

전세계 언론의 취재 경쟁 속에서도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김 위원장의 동선(動線)이 처음 확인된 곳은 중국 내륙 우한(武漢)이었으며 이후 남부 광둥(廣東)성의 광저우(廣州)와 선전(深<土+川>) 등에서 잇따라 그의 모습이 포착됐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방문코스가 1992년 1월 당시 88세의 덩샤오핑(鄧小平)이 노구를 이끌고 나섰던 ‘남순(南巡) 강화’가 진행된 행로라는 점을 주목했다.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운명을 건 당시 덩샤오핑의 도박은 이후 욱일승천하는 오늘의 중국을 탄생시킨 밑거름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김 위원장은 덩샤오핑의 숨결을 다시 확인하려 했으며 이런 그의 마음에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북한을 새롭게 재편하고자 하는 결단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게 당시 외교가의 분석이었다.

특히 그는 아버지 김일성 주석 시절과 달리 확실한 후계자를 키워놓지도 못한 상황이다. 그만큼 권좌에 있을 때 북한의 체제 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상당했을 것이란 짐작도 가능해진다.

그리고 2007년 10월4일. 남북한 정상이 평양에서 내놓은 선언의 내용을 보면 지난해 초 중국 개혁.개방의 1번지에서 김 위원장이 보고 느끼고 결심했던 것이 현실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분석도 엉뚱해 보이지 않는다.

해주 일대에 대규모 경제특구를 개발하고 남포와 안변에 조선 협력단지를 조성하며 경의선 철도를 개보수한다는 합의가 특히 눈에 들어온다. 특구 등을 개발하는 자본은 물론 남쪽에서 조달한다.

마치 중국이 개혁.개방의 돈줄을 해외에 퍼져있는 화교(華僑)들의 자본에서 찾은 덩샤오핑의 아이디어를 보는 듯하다.

김 위원장이 개성공단이라는 작은 실험을 통해 경제특구에 어느 정도 자신을 갖게 됐으며 이런 자신감을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변화를 추진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번 합의에는 남쪽의 요구가 거의 그대로 반영돼 있다. 이른바 김 위원장의 ‘통큰 결단’이 아니고는 채택되기 어려운 것들이 적지 않다.

김 위원장의 ‘결단’은 평화체제와 비핵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서 더욱 확실하게 체감되고 있다.

북한이 남쪽의 자본은 물론 해외의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하고 미국과의 관계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김 위원장은 이번 정상회담 기간 이런 의지를 내비쳤다.

이 대목에서 김 위원장이 ‘왜 이 시점에서’ 자신의 결단을 실천에 옮기려 하는가가 관심사로 떠오른다.

송민순 장관 등 외교부의 고위간부들은 “그동안 6자회담 무대를 포함해 다양한 자리에서 북측을 향해 ‘시기를 놓치지 말라’는 충고를 해왔다”고 강조한다.

클린턴 행정부 말년에 한때 수교를 검토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갔다가 북측의 머뭇거림으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한 경험을 잘 헤아리라는 권고를 수차례 북한 측 인사들에게 해왔으며 북측 인사들도 이에 그다지 거부감을 피력하지 않았다는 게 외교부 당국자들의 전언이다.

이렇게 보면 바로 며칠 전 베이징에서 끝난 제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에서 북한이 보여준 ‘양보’의 의미도 이해된다.

당시 북한은 ‘테러지원국 연내 해제’를 합의문에 명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막판에 갑자기 입장을 바꿔 시한을 박지 않은 합의안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도중 6자회담 북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까지 불러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도록 했다는 점은 당시 북한의 양보가 김 위원장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짐작케한다.

결국 5㎿ 원자로를 비롯한 영변 핵시설을 최소한 불능화하기로 결심한 김 위원장이 흔히 말하는 ‘통큰 거래’를 결심했다는 분석에 힘을 싣는 대목이다.

김 위원장의 결심에는 일종의 ‘시한’이 느껴진다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분위기다.

북핵 소식통은 “북한측의 행보를 분석해보면 적어도 부시 대통령의 임기내에 북한을 둘러싼 제반 정세를 획기적으로 바꾸려는 의지가 엿보인다”면서 “임기가 반년도 남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과 회담에 나선 김 위원장의 행보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부시 대통령의 ‘종전선언’ 발언 취지를 설명한 노 대통령에게 ‘동의의 뜻’을 피력한 뒤 ‘남쪽에서 잘 해보시라’고 부탁한 것도 부시 행정부 임기내에 확실한 거래를 하려는 그의 의중을 그대로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올 연말과 내년이 김 위원장의 전략적 선택의 성패가 판가름날 시기가 될 전망이다.

특히 부시 미국 대통령도 북한이 철저한 비핵화에 나설 경우 자신의 임기가 끝나는 내년 내에 모든 장애를 뛰어넘는 ‘통큰 거래’를 마다하지 않을 기세다.

외교소식통은 “6자회담의 진전, 남북관계의 변화, 중국의 이해관계와 함께 핵심당사국인 북한과 미국의 최고지도자가 지향하는 바를 종합해보면 한반도 정세가 내년을 기점으로 획기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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