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동거녀 성혜림과 고영희

▲김정일의 ‘정실’역할을 해온 고영희

김정일이 장기간 동거한 여자는 성혜림과 고영희다. 성혜림은 여배우 출신이고 고영희는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출신이다.

김정일은 성혜림과는 1968년부터 연애를 시작해 성혜림이 모스크바로 신경쇠약 치료를 받으러 가기 전까지 함께 살았고, 고영희는 1975년부터 2004년 사망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물론 그 사이에도 김정일은 다른 여성과 공식∙비공식 관계를 가졌지만 성혜림과 고영희처럼 장기간 동거하며 자식까지 둔 여자는 없다. 두 사람은 모두 사망했다.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김일성)을 계모(김성애)에게 뺏기고 외롭게 밖으로만 돌던 사춘기의 다감한 정일에게 그 ‘형수(성혜림)’의 인상은 모성의 향수 같은 것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후리후리한 키, 흘러내린 어깨, 연출가들이 두고두고 옆 얼굴만 찍던 그 애의 ‘성공적인 콧날’은 유순하고 단정한 입모습과 함꼐 혜림의 얼굴의 특징이었다.(성혜랑 『등나무집』中)

성혜림은 김정일의 첫 번째 동거녀다. 당시 혜림은 빼어난 미모와 어린 시절 교육받은 교양 있는 예절로 북한 사회에서 인기가 높은 여배우였다. 그녀는 김정일보다 다섯 살 위이자 친구의 형수였다. 김정일은 이십 대 후반까지 여러 여성과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랑은 성혜림이 처음이다.

혜림은 김정일보다 세 살 많은 이혼녀

혜림은 경남 창녕의 한 명문가의 3대 독자인 아버지 성유경과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 <개벽>의 여기자였던 김원주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서울 풍문여중에 다니던 혜림은 전쟁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따라 북으로 갔다. 평양 예술학교에 졸업 후 19살에 당시 정치 경제적으로 최고의 혼처였던 이기영(전 조선작가동맹위원장)의 장남 이평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혜림은 이평과의 사이에서 ‘옥돌’이라는 딸을 낳았다. 결혼 도중 연극영화대학에 입학한 혜림은 연출과를 졸업하고 예술영화 <분계선의 마을>을 시작으로 북한 최고 배우로 성장하게 된다. 60년대 말, 촬영소에 자주 나와서 영화를 지도하던 ‘웃분'(김정일)이 혜림을 포착했다. 그때까지 혜림이는 많은 영화 주연을 한 중견배우였지만 이른바 ‘토대'(계급성분)가 나쁘기 때문에 배우급수도 안 올려주고 당원도 시키지 않았다.

혜림은 김정일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미인이다. 또 어린 시절 일찍 어머니를 여읜 김정일에게 연상인 혜림은 따스한 모정을 느끼게 해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김정일과 밤을 세우며 이야기 할 수 있는 혜림의 영화에 대한 전문 지식도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좌)과 김정일의 첫 동거녀 성혜림(우). 어린시절 어머니를 잃은 김정일은 연상의 성혜림에게서 모정을 느껴 동거를 시작했으며 이후에도 어머니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여성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계모와 권력암투를 벌이면서도 ‘유부녀와의 동거’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혜림을 관저로 불일 정도로 김정일은 혜림에게 빠져있었다.

“혜림은 우리 가정이 처했던 위태로운 정치적 처지를 구원하기 위하여 왕자가 내민 그 세도를 받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성혜림이 타산만으로 왕자(김정일)를 수용한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둘이 무척 잘 맞는 짝이었다. 만약 그들이 정상적인 쌍이었다면 깨 쏟아지게 재미있게 살았을 것이다. 그들은 동질의 감성, 예술적 센스, 기지로 손뼉이 딱 맞아 떨어지는 교감으로 재미있어 죽는 친구 같았다.” 성혜랑 저 『등나무집』中

혜림 아들 정남, 알려져서는 안될 인물

혜림은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끝내면서 이평과 이혼했다. 1968년부터 혜림은 영화에 출연하지 않고 김정일과 연애를 한 것 같다. 69년부터 동거에 들어갔고, 김정남을 임신한 70년에 중성동 관저에 들어갔다. 김정남은 71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성혜림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비밀로 하는 마당에 아들을 낳았다는 얘기도 할 수 없었다.

김정일의 ‘동거녀’ 성혜림과 정남은 북한에서 절대 알려져서는 안될 존재들이었다. 김정일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었지만 세상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말 그대로 그들은 김정일이 쳐놓은 울타리를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생활한 관저는 ‘화려한 감옥’이었던 셈이다.

▲ 김정남의 어릴적 모습(우)과 일본에서 체포되었을 때의 모습(상). 우측 사진의 왼편에 위치한 인물이 남한 망명후 사망한 이한영.

김정일은 김일성의 재촉으로 1974년 김영숙과 결혼했다. 76년경부터는 고영희와 동거에 들어갔다. 김정일도 혜림과 정남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이것을 안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가 혜림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언니는 우리 오빠보다 나이도 많고 한번 결혼해서 애도 딸린 여자니까, 정남이는 내가 키울 테니 나가시오. 노후는 잘 보장해 주겠소.”

김경희가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이것은 성혜림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던져준 것 같다. 언제 자식을 빼앗기고 쫓겨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혜림은 신경성 질환과 불안으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불안, 우울증, 신경쇠약, 노이로제가 겹쳤다. 결국 혜림은 74년부터 모스크바로 치료를 다니게 된다.

성혜림, 200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70년대 후반 모스크바에서 혜림은 병이 심해 밤마다 구급차가 와서 독한 주사를 놓아줘도 자지 못했다. 불안발작이라는 차마 볼 수 없는 신경병은 본인의 고통도 형언키 힘들다지만 곁에서 보기도 괴로울 정도였다고 한다. 성혜림은 이때부터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요양하다가 가끔 평양에 들어갔다. 혜림은 200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김정일의 두번째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이 고영희다. 그녀는 1952년생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용수 출신으로 남한에서 흔히 말하는 ‘기쁨조’로 활동하다 김정일의 눈에 띄었다. 김정일이 고영희를 집에 들인 것은 1979년경이다. 그녀는 김정일이 일본 여배우 중에 가장 예쁘다고 말한 요시나가 사유리와 매우 닮았다고 한다.

고영희는 만수대예술단으로 일본 공연에서 각광을 받았다. 고영희는 1975년경부터 김정일의 비밀파티(‘비밀파티’는 3부에서 게재)에서 ‘지도자 동지’의 옆자리에 앉았다. 당시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다. 77년부터는 아예 파티에도 참석 시키지 않았다.

▲ 조선민요집 모델이었던 고영희(좌)와 아들 김정철(상). 김정철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파티장에 들어설 때부터 김정일과 동행했고, 직접 겉옷까지 벗겨주었으며,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김정일은 고영희와 연애하면서 벤츠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겼으며 차 안에서 한국 노래를 밤새도록 듣기도 했다.

고영희는 창광산 관저에서 지냈다. 고영희는 81년에 아들을 낳았다. ‘정철’이라는 이름은 정남의 외할머니(성혜림의 어머니 김원주)가 지어주었다고 한다. 김정일이 어느날 김원주에게 “정남이의 이름을 다르게 지어보라”고 해서 김원주가 ‘정철’로 지었다는 것이다.

고영희는 83년 정철의 동생 정운을 낳았다. 고영희가 둘째 아들을 낳자 김정일의 사랑이 정남에게서 정철•정운으로 옮아갔다.

고영희가 사실상의 정실 역할

고영희의 아버지는 북송교포 출신 고태문이다. 고태문은 북한유도의 창시자다. ‘북한유도’는 고태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북한유도의 간판이었다. 고태문은 북으로 와서 평양체육단 유도 감독을 지냈다. 고태문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외동딸이 김정일 관저로 들어간 것이다.

북한에서는 북송교포들을 ‘째포’라 부른다. ‘째포’는 ‘재일교포’의 준말이자 비어다. ‘째포’들은 정치∙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는다. ‘째포’들은 당 내부 인사지침에 따라 당 일꾼, 사법, 외교, 항공, 해운 부문에 채용되지 못한다. 군에서도 장교가 될 수 없다. 1개 기관에 북송교포를 배치하는 비율도 1.5%로 상한선을 그어 놓았다. 이러다 보니 이들은 대개 경제, 기술, 예체능 분야에 몰린다. 고영희도 이러한 정책의 영향을 받아 만수대 예술단 무용단원이 된 것이다.

고영희는 비교적 성격이 밝고 친절하며 인내심과 참을성이 많아 보였다고 김정일 전담 요리사 후지모토는 말했다. 김정일은 고영희가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 여행을 가거나 도쿄의 디즈니랜드에 놀러가는 것을 허락할 정도로 그녀를 매우 신뢰했다. 그녀는 평양 창광산 관저에 살면서 김정일이 각지로 이동할 때마다 반드시 함께 다니는 사실상의 ‘정실’이었다.

김정일의 사생활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있다. 김정일과 고영희의 동거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은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이 거의 유일하다. 고영희는 2004년 8월 프랑스에서 유선암 치료를 받고 귀국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이 52세였다. 그녀의 죽음도 북한에서는 비밀에 부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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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NK 기획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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