黨 선전비서 정하철은 이렇게 몰락했다

▲ 북한 삼수발전소 준공기념식 모습 ⓒ연합

지난 5월 북한은 삼수발전소 준공식을 열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선군시대 기념비적 창조물로 훌륭히 일떠선 삼수발전소’라는 제목의 선전물을 집중적으로 방영했다.

삼수 발전소는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제 5차 대회 때부터 논의가 됐었다. 그러나 건설 장소의 지질 구조가 부적합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삼수발전소가 갑자기 부활하고 과학자들과 설계부분 일꾼들 속에서 치열한 논쟁 대상이 된 것은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의 권력암투 때문이었다. 삼수발전소 건설은 당 선전선동부의 부상과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또한 2000년대 초중반 선전선동부를 주도했던 정하철 선전선동 담당비서와 최춘황 중앙위 제1부부장의 급성장과 몰락 과정을 잘 보여준다. 정하철은 그동안 정치적 숙청설이 계속 제기돼왔지만 정부는 이 사실을 공식 확인하지 못했다. 정하철은 우리 정부가 발간하는 각종 북한 인명집에 여전히 선전선동 비서로 소개되고 있다.

정하철은 2005년 10월 당 창건 60돌 경축 중앙보고대회 주석단으로 참석한 이후 공개 석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다. 그는 올해 4월 북 인민군 창건 75돌 열병식 주석단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선전선동부 도약의 발판 6.18돌격대

1999년 6월 18일 ‘고난의 행군’의 반전을 꿈꾸는 김정일이 양강도 일대를 시찰하면서 삼지연 건설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 과업을 선전선동부에 맡겼다.

그때 조직 된 것이 바로 ‘당 사상 선전일군 돌격대'(약칭 6·18돌격대)였다. 2000년 12월부터 강제 모집된 ‘당 사상 선전일꾼 돌격대’는 2001년 4월 15일 정식 발족식을 가졌고 여기에 동원된 연 인원은 5만 명이상이었다.

김정일은 6.18돌격대를 수백만이 죽어 나가던 1990년대 중반을 지나 “공화국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더욱 강대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전의 수단으로 여겼다.

건설을 이끈 선전선동부는 6·18돌격대를 통해 지난 20년간 조직지도부 위세에 눌려왔던 중앙당 내 권력 구도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6.18돌격대를 이끌던 최춘황은 김정일의 삼지연 1호 도로 건설을 마치고 새로운 건설을 궁리했다. 이 건설은 선전선동부에 대한 김정일의 신임을 굳히는 획기적인 사업이어야 했다.

권력 암투의 상징 삼수발전소

1970년대 김정일이 문화예술부문사업을 맡으면서 중앙당 내부에서 선전선동부는 가장 힘 있는 부서로 공인되어 왔다. 그러나 1980년 당 제6차대회에서 김정일이 당중앙위원회 조직비서로 등장하면서 권력구도는 선전선동부에서 조직지도부로 바뀌었다.

조직지도부에 밀려 2인자 신세를 면치 못하던 선전선동부를 다시 조직지도부와 경쟁관계로 올려 놓은 것은 다름 아닌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었다.

대부분의 자원이 바닥난 상태에서 당 조직마저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북한 당국은 모든 선전 수단을 동원해 제국주의자들과 안팎의 원수들의 반 공화국 고립말살 책동을 분쇄하자고 떠들어댔다. 그리고 뜻밖의 자연재해로 ‘일시적 난관’을 겪는다고 국민들을 기만했다.

그때 급부상한 것이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최춘황과 2000년 선전선동부장으로 승진한 중앙방송위원장 정하철 이었다.

북한 권력 내에서 별로 이름 없던 두 사람이 ‘고난의 행군’과 더불어 김정일의 제일 충실한 일꾼이자 측근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최춘황은 1999년 한 해 동안 김정일의 시찰을 수행한 것만 40여 차례 이상이다. 최측근들의 비밀파티 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김정일의 신임을 선전선동부에 빼앗긴 조직지도부는 선전선동부가 하는 일을 곱게 볼 리가 만무했다.

결혼식 문제로 역습 가한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가 삼수발전소 건설 문제를 제기하자 조직지도부가 즉각적으로 제동을 걸고 나섰다. 채취공업성과 탐사관리국 조사단까지 파견해 지질구조 때문에 삼수발전소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들었다. 언제에서 물이 새면 주변의 혜산청년광산이 침수되게 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선전선동부 역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지반 조사를 실시하고 프랑스식 사석언제(돌과 흙으로 다진 언제)로 비용을 훨씬 줄일 수 있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석회암층 바닥엔 시멘트 분사와 함께 진흙을 1M 이상 깔아 물이 새는 것을 충분히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민들에게 사기를 불어 넣고 내부 결속을 다질 충격효과를 물색하던 김정일은 건설을 강행하겠다는 선전부 쪽에 손을 들어주었다.

2004년 2월 혜산시 장안리의 운총강과 허천강 합수목에 ‘당 사상선전일군돌격대’ 3만 명의 인원이 몰려들었고 착공식은 5월에 가졌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권력을 양보할 조직지도부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 당시 조직지도부 1부부장에는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이 군림하고 있었다.

2004년 3월 최춘황의 딸과 조선체육지도위원회 모 간부의 아들간의 결혼식을 발화점으로 조직지도부가 칼을 뽑아 들었다. 중앙당을 비롯해 선전부에 줄서기를 하던 간부들이 점수를 따려고 이 결혼식에 경쟁적으로 몰려 들었다. 한사람이 보통 미화 1000달러 정도를 부조했다.

이것은 권력실세들의 결혼식이면 의례히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전선동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조직지도부가 이것을 물고 늘어졌다.

조직지도부는 이 결혼식이 호화결혼식이며 최춘황이 세력을 형성하려는 시도라고 김정일에게 보고해 결혼식 참석자들을 모두 소환했다. 조직부가 본격적으로 사건 검토를 시작해 1000달러 이상을 부조한 간부 31명을 철직시키고 혁명화로 농촌에 쫓아버렸다.

조직지도부는 이 사건을 시작으로 2004년 3월부터 5월사이 전국적으로 술 풍을 반대하는 대 캠페인을 벌여놓았다. 그리고 ‘직무태만, 수정주의 날라리 풍’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간부들을 척결했다.

2004년 5월 조직지도부를 꺾고 선전선동부의 권력기반을 닦아 놓은 최춘황은 당 내부 질서를 위반하고 곁가지(김정일 주변에서 측근들을 규합해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는 행위)라는 북한에서 가장 큰 죄목으로 철직되었다. 최춘황의 철직으로 선전선동부는 허리가 꺾인 셈이 됐다.

선전선동부의 추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직지도부는 눈엣 가시같은 존재였던 정하철 비서를 2005년 정치 사건에 연루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했다. 그는 평안남도 북창군 소재 득장관리소에 수감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중앙당 내부에서 최고 권력을 꿈꾸며 그 기반으로 삼아온 ‘당 사상 선전일군돌격대’의 실권은 선전선동부에서 조직지도부로 완전히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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