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北발사체 대응은 `클린턴식’ `부시식’?

북한이 내달 4∼8일 사이에 `광명성 2호’를 발사할 경우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대응 방향은 1998년 ‘광명성 1호’ 때의 클린턴 방식일까, 아니면 2006년 장거리 미사일 발사 때의 부시 방식으로 나타날까 주목된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부인으로 클린턴 전 대통령의 대북 협상을 지켜봤던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방미중인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여러 다양한 방식”의 대응을 거론하면서도 가정적인 상황이라며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과거 두 차례 발사는 모두 예고하지 않은 가운데 이뤄졌다는 공통점 속에 미국의 대응 방식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과 협상을 택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결의를 추진하다 의장성명을 통해 국제사회의 우려를 전달하는 선에서 그치고 그해 10월 뉴욕에서 북한과 미사일 회담을 가졌다.

이미 1996년 4월과 1997년 6월 두 차례 북한과 미사일 회담을 가졌던 터였다.

`대포동 1호(광명성 1호)’ 발사 이후 미국내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11월 의회의 입법을 통해 대북 정책조정관으로 임명된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 이듬해 5월 방북한 뒤 포괄적 대북 접근 방안을 내놓았다.

이를 기반으로 1999년 9월 열린 북미 미사일 회담을 통해 북한은 미사일 시험발사를 유예하겠다는 선언을 내놓았고 2000년에는 북한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방미,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을 거치며 북한과 미국은 미사일 문제 해법에 대해 합의 직전까지 도달했었다.

북한은 사거리 300마일(약 500㎞) 이상 미사일의 생산과 개발, 배치를 중단하고 이미 보유한 것은 수년내에 폐기하기로 했으며 단거리 미사일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을 준수하고 MTCR 지침을 초과하는 미사일 및 관련부품과 기술의 대외판매를 중단하기로 했다.

반대급부로 미국은 북한에 대해 매년 3개의 인공위성 발사를 지원하고 현금 보상대신 매년 10억달러의 식량 등을 수년간 지원키로 했다.

당시 북한과 `돈을 주고 사는’ 직접 거래형 `빅딜’로 미사일 문제를 풀려고 했던 클린턴 방식은 북한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으나 완전합의를 목전에 두고 클린턴 행정부가 부시 행정부로 바뀌는 바람에 미사일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부시 대통령은 핵문제에 대해서처럼 북한의 장거리미사일에 대해서도 강경책을 선택했다.

북한이 2006년 미사일을 발사하기 약 1년전인 2005년 9월 북핵 6자회담은 `9.19공동성명’을 도출해냈지만 직후 미국이 북한의 위조 달러화 문제를 제기하며 대북 압박을 본격화하면서 6자회담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2006년 4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에 북한은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파견했으나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지침에 따라 북한과의 접촉을 거부, 김계관 부상은 힐 차관보를 코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후 북한은 미국을 겨냥해 압박과 위기의 수위를 높여가다 7월 미국 독립기념일 ‘축포’를 쏘듯 장거리미사일과 중.단거리 미사일을 함께 발사했다.

부시 행정부는 일본과 손잡고 유엔 안보리를 통한 대북 제재를 추진, 일본이 발의한 대북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부시 대통령이 대북 군사적 제재도 가능케 하는 `유엔헌장 7조’를 원용한 일본의 발의안을 지지하자 중국과 러시아는 군사적 제재 가능성을 피하는 선에서 타협한 대북 결의에 찬성했다.

북한은 박길연 당시 유엔주재 대사의 성명을 통해 결의가 “정치적 목적”에서 채택됐다며 “전적으로 거부할 것”이라고 밝히고는 그해 10월 핵실험으로 안보리 결의에 대답함으로써 `강경에는 초강경으로’라는 북한식 대응 방식을 재확인했다.

이어 부시 행정부는 중간선거에서 패배하자 2007년 1월 힐 차관보가 베를린에서 김계관 부상과 만나 북미 양자회담을 갖도록 허용함으로써 북핵 문제를 풀기위한 실질적인 해법을 모색하게 됐다./연합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