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주민 포용할 시민의식 갖춰야 통일대박 이룬다

라이프치히의 월요데모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동독인의 통일 열기를 확인한 헬무트 콜 연방총리는 서독인의 머릿속에만 머물고 있던 통일의 가능성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됐다. 콜 총리를 중심으로 한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서독 주민들이 다가올 통일의 감격에 취해 있었다.

동독의 공산 권력도 호네커가 망명하는 등의 사건을 겪으며 급격히 와해됐다. 이처럼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가장 위험스러웠던 것은 통일 열기에 취해 통일이 삶의 현실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쿠르트 비덴코프(Kurt Biedenkopf)는 이 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했던 몇 안 되는 정치인 중에 하나였다. 보쿰 대학 교수와 총장을 역임한 비덴코프는 1973년 기민련(CDU) 사무총장에 선임돼 정치인 콜과 함께 당을 이끌어왔다.

콜과 비덴코프, 두 정치인이 정책을 놓고 갈등을 빚게 된 것은 통일이 되면서부터였다. 통일이 되자, 동독 작센 주의 재건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1990년 작센 주 총리에 선출된 비덴코프는 잇따라 발표되는 정부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비덴코프의 대표적인 주장은 통일 정부가 실현 불가능한 정책을 제시해 국민들의 환상을 부추긴다는 비판이었다. 동독 국민들에게 수년 내에 서독에 버금가는 경제적 풍요로움이 가능하다는 산술적 약속보다는, 동서독간 벌어져 있는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인정하고 수용하도록 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주장이었다.

그가 이 같은 주장을 내세운 건 동독 경제의 낙후성 때문이었다. 비덴코프는 일정한 기간 내에 동독 경제가 서독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는 약속은 피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통일 후 10년 내에 동독 경제가 서독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서독의 국민소득이 매년 1.5% 증가한다는 가정 하에 동독은 매년 16%의 성장률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당시 동독에는 사회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10%대의 경제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허구였다. 향후 20년이 경과해도 동독의 서독 따라잡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이 때문이었다.

대신 비덴코프가 강조한 경제보다 우선해야 할 시민의식이었다. 비덴코프는 어차피 한 세대가 흘러도 경제적 평등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현실을 인정하고, 대신 경제우선정책만큼 시민의식을 계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강조한 시민의식은 반세기 동안 폐쇄적으로 유지돼 온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해가려면 그 과정에서 상대적 격차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식과, 서독의 풍요로움은 그동안 서독 주민들이 흘린 땀과 노력의 결과라는 의식이었다.

이처럼 비덴코프는 불가능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적 포퓰리즘보다는 현실에 근거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일이 진정 동서독 간의 상대적 박탈감을 줄이고, 동서 갈등을 완화하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후 비덴코프는 2002년까지 12년 간 동독 작센 주의 총리로 일했다.

김정은 정권의 독재 아래서 신음하고 있을 북한 주민들을 포용하며 통일을 준비해가야 할 한국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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