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탈북민에 자유 길 열어줄 ‘제2의 헝가리’ 돼야

해마다 6월 27일이 되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 도시 소르폰에서는 1989년 헝가리가 대(對)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당시 양국의 외무장관이었던 기율라 호른(Gyula Horn)과 알로이스 모스크(Alois Mock)가 국경 개방 행사에 참석해 동독을 떠난 동독인에게 서방으로의 통로를 열어줬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다.

1989년 여름, 정치적 억압과 빈곤으로 고통 받아 오던 동독인들의 불만이 폭발함에 따라 동독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서방세계의 자유와 경제적 풍요로움을 동경해오던 동독인들이 조직적으로 동독을 탈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8월 8일에는 131명의 동독 주민이 동베를린 소재 대표부에 진입했고, 체코와 폴란드 등 동유럽 주재 서독대사관도 연일 몰려드는 동독인으로 장사진이었다. 대사관의 뜰은 이들 군중을 수용하기 위한 텐트로 꽉 차 있었고, 점점 증가하는 규모를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 대사관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요구는 한결 같이 서독행이었고, 서독 정부는 모든 노력을 다해 탈출자들의 서독행을 보장해줬다.

이러한 동독 탈출의 절정은 8월 19일 헝가리 민주단체와 범유럽 유니온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 도시 소프론(Sopron)에서 개최했던 한 행사장에서 이뤄졌다. 행사에 참가했던 600여 명의 동독 청년들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게 된 것이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이후, 조직적으로 이뤄진 대규모의 탈출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독과 서독 정부는 “20세기 최대의 외교전쟁”이라고 불릴 만큼 한 치의 양보조차 허용할 수 없는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됐다. 대상은 헝가리 정부였고, 목표는 대(對) 오스트리아 국경의 개폐 여부였다. 탈출 사태가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동독의 호네커 총서기는 탈출 초기 “탈출자들은 서독 정부의 흑색선전에 말려든 조국의 배반자”라고 비난하면서 “배반자는 조국을 떠나라”고 주장했다. 헝가리가 서독행의 경유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것이다.

호네커는 또 네메츠 총리가 이끄는 헝가리 정부에 양국의 사회주의 유대를 강조했으며, 만약에 지속적으로 국경을 개방한다면 외교단절은 물론 전통적인 동맹 관계가 손상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와 더불어 동독 정부는 헝가리의 경유국인 폴란드와 체코의 국경을 폐쇄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이에 반해 서독정부는 자유를 찾아 고향도 등지고 탈출을 감행하는 동족을 돕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임이라고 설득했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헝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개방해 동독 탈출자에게 자유의 통로가 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외교전이 얼마나 치열하고 역사적이었는가는 당시 헝가리 총리와 외무장관을 지냈던 네메츠 총리와 호른 외무장관의 고백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고백은 당시 독일의 최대 시사주간지 데어슈피겔 지에 게재됐고, 호른 외무장관은 무려 7, 8페이지에 달하는 당시의 역경의 순간들을 피력했다.

결국 20세기 최대의 외교전은 생명과 자유, 인권을 중시하고 도덕적으로 월등한 서독의 승리로 끝났다. 헝가리가 국경개방을 결정한 순간부터 두 달간 무려 2만 4000여 명의 동독인들이 자유세계의 품에 안겼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베를린 장벽은 철거됐고, 통일의 길이 활짝 열렸다. 1989년 11월 9일의 일이었다. 탈북자들에게 자유와 희망을 선사할 제2의 헝가리가 등장할 날도 멀지 않았다.

얼마 전 북한식당에서 집단으로 탈북해 귀순한 종업원 13명은 중국에서 동남아의 제3국을 통해 국내로 입국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조중 특수 관계를 이유로 탈북민을 북송했던 중국이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 체택 이후로 한국 쪽으로 기운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동독 대탈출 당시 국경을 개방해 베를린 장벽 철거에 기여했던 헝가리처럼 중국도 북한 주민을 자유로 이끌어 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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