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동·서독 사례…첫 회담 후 20년 만에 통일

세계적으로 민족의 분단과 재통일 사례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 통일의 물꼬를 튼 동.서독 정상회담은 남북 정상회담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과 교훈을 주고 있다.

특히 2000년 첫 번째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이번 정상회담은 남북한 정상 간의 만남을 정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으로 평가됨에 따라 독일 통일 과정에서 9차례 이뤄진 동서독 정상회담의 진행 과정과 결과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동서독 정상회담의 실마리는 `동방정책’의 주창자인 빌리 브란트가 1969년 10월 서독 총리에 취임하면서 비롯됐다. 브란트 총리는 취임연설에서 “독일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서로 외국이 아니다. 두 국가는 단지 특별한 관계에 있다”며 소위 `2국가론’을 제기했다.

브란트 총리는 이어 조약으로 규율되는 협력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정부차원의 협상을 동독에 제의했다. 이와 함께 서독 정부는 동유럽에서 소련의 주도권을 고려해 모스크바 정부에 양해를 구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1970년 1월 서독과 소련은 외무장관 회담을 통해 무력포기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국내적인 준비와 국제적인 정지작업을 거쳐 드디어 1970년 3월 19일 동독 지역인 에어푸르트에서 브란트 총리와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 간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분단 25년 만에 실현된 동서독 정상회담은 국민의 큰 기대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성과없이 끝났다. 이어 5월 21일 서독의 카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도 별다른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실무차원의 접촉을 계속하기로 약속하는 선에서 회담을 종결했다.

두 차례의 정상 간 만남 이후 10여 년 간 정상회담은 열리지 못했으나 실무접촉이 계속 이어져 1972년에는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돼 양독 관계의 안정적인 평화공존을 실현할 수 있었다.

1981년 헬무트 슈미트 총리, 1987년 헬무트 콜 총리가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만나 냉전 막바지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1989년 동독인의 서방 탈출 러시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그해 12월 콜 총리와 한스 모드로프 동독 총리 간의 정상회담이 열려 통일 문제에 급진전을 보았다. 이후 1990년 10월 3일 동서독이 통일될 때까지 4차례 정상회담이 더 열려 통일을 완성하는데 정상 간의 만남이 크게 기여했다.

동서독은 1970년 첫 번째 정상회담이 열린 지 20년 만에 통일을 이룩했다.

동서독 정상회담은 상호 실체를 인정하면서 평화공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과거 동독을 비합법 국가로 간주하고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와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하고 실질적인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는 정책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후 서독은 동독과의 지루한 협상 과정에서 여행자유화와 상호방문 기회를 확대하고 동 서독 간 인적, 물적 교류의 확대를 한결같이 추진했다. 비록 초기의 정상회담 과정에서 획기적인 정치적 타협이 이뤄지지 않았으나 장기적으로 추진한 상호 교류의 증대는 동독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초래했으며 이것이 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한.독 의원친선협회 회장인 하르트무트 코시크(기사당) 의원은 “동서독 정상회담은 동서독 간 긴장완화 과정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으며 이 때부터 시작된 동서독 간 교류 및 협력 확대 과정은 1990년 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계속됐다”고 말했다.

코시크 의원은 “2000년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서도 이 같은 과정이 시작됐으며 이번 정상회담은 이 과정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남북한은 지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함으로써 `화해.협력의 단계’를 규율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동서독이 정상회담을 통해 `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평화공존’의 틀을 마련한 것처럼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남과 북이 화해.협력에서 한 단계 진전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지 주목된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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