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사건… ‘서해교전’을 기억합니까?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군인들이 푸대접 받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인 것 같다. 국민 모두가 축구공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그 속에 끼어들지 못하는 군인은 죽어서도 외톨이였다.”

올해로 5년째를 맞이하는 서해교전 이야기를 다룬 소설 『서해해전』(지성의 샘)의 저자 최순조 씨는 ‘그들은 눈물 흘리지 않았다’는 말로 당시를 회상했다.

월드컵으로 온나라가 들썩이던 2002년 6월29일. 서해 연평도 앞바다에서 북한 경비정과의 교전으로 해군장병 6명이 전사하고 고속정 1척이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월드컵의 뜨거운 열풍과 효순이 미선이 사건에 가려 이 사건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월드컵과 나라를 동시에 지키다 숨진 서해교전 전사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소설 『서해해전』은 대부분 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당시 전사한 6명의 장병이 실명으로 등장해 긴박하고 치열했던 전투현장을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1년간 해군 부사관 생활을 했고, 서해교전이 벌어진 연평도에서도 근무한 바 있는 저자의 경험 때문인지 이 책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소설의 시작은 2002년 서해교전이 아니라 1999년 벌어졌던 연평해전이다. 당시 100여명의 북한국 사상자가 발생했던 연평해전 후 북한은 복수의 칼을 갈았다. 남한정권의 햇볕정책을 통해 지원을 받으며 3년 뒤 남한정권의 선제공격 교전수칙을 이용해 서해교전을 일으킨다.

1999년과 2002년 벌어졌던 사건은 작가의 말대로 ‘그들만의 눈물’로 끝났을 뿐이다. 1999년 연평해전에서 우리 군은 북한군의 도발을 막아냈지만, 이를 이끈 박정성 사령관은 남북 평화무드에 휩쓸려 좌천됐다. 2002년 서해교전에서 희생자들 역시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국민으로부터 외면 받았다.

특히 서해교전 때 전사한 6명의 해군 용사들의 장례는 이름뿐인 ‘해군장’으로 허겁지겁 치러졌으며, 이들의 영결식에는 국무총리와 각료,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국군 통수권자인 김대중(DJ) 대통령은 교전 다음날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한다며 일본으로 떠나 영결식이 끝난 뒤에야 귀국했다. 이들을 위해서는 그 흔한 촛불집회 하나 열리지 않았다.

저자는 이 사건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서해교전’ 표현 대신 ‘서해해전’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서해교전’이라는 표현에는 애써 사건을 우발적 원인으로 축소하고, ‘실패한 전투’라는 이미지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해해전’으로 당시 전사자들의 명예를 살리고자 했다고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호국보훈의 달 6월이 돌아왔다. 6일은 현충일이고, 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이며, 29일은 2002년 서해교전이 있었던 날이다.

국가보훈처는 한달을 ‘추모의 기간, 감사의 기간, 화합과 단결의 기간’으로 나눠 다양한 추모행사를 개최한다고 한다. 그러나 형식적인 추모행사만 있을 뿐 국민적 애도를 모으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이들 앞에서, 지도자들은 국가와 국민에 떳떳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다시 한번 새겨봐야 할 것이다.

김소열/자유주의대학생네트워크 정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