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사라지면 통일 자동적으로 이뤄질까

분단 이후 오늘날까지 대북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통일이다. 동북아 안정이니 한반도 평화라는 것도 실은 남북이 통일돼야 진정 가능한 일이다. 분단 상태에서의 안정이나 평화는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다. 통일정책은 말 그대로 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정부의 결정이며 대북정책은 ‘북한문제관리’를 통해 통일을 실현해 나가는 방법의 일환인 셈이다.


여기에는 암묵적으로 전제가 하나 있다. 어떤 식(?)이든 언젠가 통일은 될 것이라는 점. ‘어떤 식’에는 북한정권이 원하는 ‘적화’통일은 아예 고려조차 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다만 이 ‘언젠가’의 문제가 이제는 가시권에 들어오지 않았냐는 분위기가 ‘통일대박론’으로 표출됐다. 현직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통일준비위원회’라는 거창한 범정부 조직이 신설된 것은 이런 인식의 반영이다.


하기사 북한정권의 ‘가세’가 기울어지기 훨씬 전이었던 1981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자신을 의장으로 하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1987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로 개명)를 신설했으니 이미 통일을 향한 정부차원의 의지와 집념은 새삼스럽지 않다. 명칭 자체에서 남한이 지향하는 통일의 방법과 수단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이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민주와 평화가 공산주의 독재와 양립하기는 실상 어려운 법. 보수정권의 통일정책은 북한이라는 독재정권이 대상이기 때문에 평화지향이라는 표현과 달리 어느 정도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10년은 그간 통일·대북정책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대통령(DJ)이 직접 나서 ‘잘 사는 큰 형이 못사는 동생네 좀 도와주는 게 도리’ 아니냐고 까지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로 나아갔었다.


남북통일을 썩 환영하지 않는 남한 국민들이 절대 다수 존재함에도 통일 자체는 피할 수 없는 일처럼 여기게 된 계기는 크게 다음과 같은 심정의 발로일터다. 첫째, 북한의 무자비한 독재 세습체제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라는 운명론. 둘째, 빈곤과 억압에 고통받는 북한주민을 해방시키는 것은 남한의 과제라는 숙명론.


핵으로 체제유지를 담보하려는 북한정권의 몸부림은 역설적이게도 핵을 가진 북한과는 공존하기 어렵다는 보수적 인식론을 잉태, 확산시켰다. ‘설화’에 가라앉고 말았지만 통준위 부위원장(정종욱)의 흡수통일 불사론은 통일 절대론의 이면에 불과하다.


김정일 체제 말기 전문가들 사이에서 우려됐던 시나리오 중 하나는 북한에 친중정권이 들어서 북한이 정치, 경제적으로 중국에 복속되는 사태가 야기되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북중관계가 한미관계 보다 끈끈한 맹방임을 감안할 때 일리 있는 분석이었으나 북한의 ‘주체성’이 중국과의 우애에 크게 의존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정설인 것처럼 알려지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 지점에서 되물어 보아야 할 질문이 있다. 진짜 통일이 되기는 할까? 설령 북한정권이 무너진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것처럼 남북이 하나의 국가가 될 수 있을까? 그 결정은 누가, 어떻게 하는가? 북한주민에 의한 투표로 가능할까? 김정은이 제거되고 개방적인 제3의 지도자가 북한정권에 등장한들 그는 남한 주도의 통일을 원할까?


정치와 경제의 지배원리가 분리된 중국식 통치방식을 원하면 어떻게 될까? 남한은 북한과 한 가족이 되자고 설득할 자신이 있을까? 북한의 지도부가 서울에 입성하여 북한식 지배를 하지 않는 이상 북한도 남한이 원하는 통일을 선뜻 받아들이진 못하지 않을까? 어쩌면 전제가 잘못돼 있는 거 아닐까?


한 때는 김일성만 사라지면 통일이 자동으로 될 것이라는 그릇된 신념이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북한의 독재자 한 명이 사라진다고 통일이 이뤄질 것이라는 환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책결정자는 통일의 당위성과 통일의 효용성을 홍보하기 전에 이런 회의감을 진하게 품고 가야 한다. 통일은 경제적 ‘대박’ 논리의 흥행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과 방법이 뚜렷한 고도의 전략에 의해 이루어져 가는 고난도의 전략게임과도 같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상징성은 단절됐던 남북 간 일반인들의 교류와 협력을 제도화했다는 점이다. 한없이 취약한 제도적 장치였으나 통일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점칠 수 있던 충분한 시험대였다. 현재 점수로는 낙제이지만 말이다. 5·24조치는 남북이 언제고 과거로 회귀할 수 있음을 입증해주는 증거물이 됐다.


남북이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하나의 체제로 통일될 수 있다는 거증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어쩌면 남북통일이란 한쪽의 리더십이 완전히 망하여 재기불능 상태가 되지 않고는 결코 설득되거나 합의될 수 없는 제로섬게임의 속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통일로 가기 위한 남북의 대전략은 ‘상대를 무너뜨려야 내가 원하는 통일이 가능하다’는 각각의 목표 위에 세워진다.


이런 ‘너 죽고 나 살기 게임’을 피하기 위해 남북이 하나의 국가가 되는 통일은 아예 하지 말자는 ‘대타협론’이 등장하지 말란 법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우 가장 이득을 보게 될 국가는 중국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발전은 답보상태를 벗어나기 힘들게 되겠지만 말이다. 
 
선택은 가치의 문제에 맞닿아있다. 결국 어떤 가치관을 선택하느냐는 개인과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철학의 문제다. 대한민국은 통일을 달성할 철학이나 가치가 정립돼 있는가. 보이지 않는 가치와 철학을 위해서 보이는 (경제적이고 비경제적인) 희생을 감내할 용기는 있는가. 갑자기 통일에 회의감이 짙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