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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폐기를 위한 ‘213 베이징 합의’가 23일로 100일째를 맞는다.
실질적 북핵 폐기를 위한 전환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출발한 ‘2·13합의’가 지금에 와서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합의 이행을 위한 행동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5차 6자회담 3단계 회의에서 6개국은 북한이 60일내 핵시설 폐쇄(shut down)에 돌입할 경우 중유 5만t에 달하는 에너지를 우선 지원(한국 부담)하고, 북한이 추가로 모든 핵프로그램을 신고하고 불능화(disabling) 조치를 취할 경우 중유 95만t에 달하는 에너지와 경제지원을 나머지 5개국이 균등하게 분담하기로 했다.
또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해 ▲한반도 비핵화 ▲경제·에너지 협력 ▲ 미·북관계 정상화 ▲북·일관계정상화 ▲동북아 평화·안보 메커니즘 등 5개 워킹그룹(working group)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 2·13합의 어떻게 되가나?=2·13합의 이후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한국 정부였다. 2월 27일부터 나흘간 개최된 20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2·13합의의 진전 상황을 지켜보며 대북 쌀·비료 지원 재개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정부는 북핵 폐기 진전 상황과 관계없이 비료 30만t에 대한 지원을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6월까지 수송을 완료할 계획이다. 지난 4월 열린 경추위에서는 쌀 40만t 차관과 8000만 달러 분의 경공업 원자재를 북한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초기조치 이행 후 북한에 지원키로 한 중유 5만t 북송을 위해 중국 선박회사와 맺은 계약이 파기되면서 약 36억원의 손실을 보기도 했다. 누가 봐도 남북관계가 과속 중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5개 분야의 워킹그룹도 첫 발을 뗐다.
3월 5일 미·북관계정상화를 위한 실무 회의를 위해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무 동아태 차관보와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뉴욕에서 회담을 가졌다. 7일부터는 북·일 관계정상화 실무회의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렸다. 그 뒤를 이어 경제·에너지 협력, 한반도 비핵화 실무회의가 순차적으로 개최됐다.
13일에는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북한을 방문했다. 19일에는 6차 6자회담이 열리기도 했지만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주변 5개국이 2·13합의 이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일 동안 정작 북핵 폐기의 당사자인 북한은 팔짱 낀 채 상황을 관망하고 있다.
북한은 특히 BDA 동결 자금이 해제에 이어 미국을 통한 송금까지 주장하며 영변 원자로 폐쇄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 BDA 송금 문제로 파행 국면 지속=미국이 BDA 북한 자금을 돌려주기로 결정하면서 걸림돌은 사라지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북 자금 송금을 요청받은 중국은행(BOC)이 신용도 하락 등을 이유로 자금 이체를 거부한 뒤부터 상황은 꼬이기 시작했다. 북 자금 송금 문제가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
불법 자금의 성격이 짙은 북한 자금을 중개하겠다는 은행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은 BDA 자금을 미국을 통해 송금해야겠다고 버티기 시작했다. 이에 미 국무부는 미국 내 4위 규모의 와코비아 은행을 통해 송금을 중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이 BDA 자금의 송금 문제로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 2·13합의에 따른 초기조치 이행 기간인 60일은 훌쩍 지나버리고 말았다. 6자회담 참가국들은 시일 문제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2·13합의에 대한 신뢰도에 큰 상처를 남겼다.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은 2·13합의에 제시된 로드맵대로 각국의 의무를 수행했다. 한국 정부는 지나치게 앞서 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북한의 초기 조치 이행 이후 상황까지 발 빠르게 준비했다.
미국 또한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국내외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BDA 동결 자금을 해제했을 뿐 아니라 북한과의 대화기조를 끈기 있게 유지하고 있다.
현재까지 이 모든 합의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북한만이 약속 이행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BDA 송금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뚜렷이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의 ‘213합의’ 이행 여부는 더욱 더 불투명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파행 국면이 길어질 경우 합의문이 가진 구속력을 상실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우리의 인내심은 무한하지 않다”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발언도 수렁에 빠져 외치는 엄포에 불과하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당분간 미국은 북한의 선택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조건이다. 이러한 파행국면은 북한이 원하는 협상 방식을 통해 핵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미국의 책임이라는 지적이 거세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