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차관보, 北대변인 자처 속사정은?

▲ 지난해 11월 6자회담 당시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김계관 부상을 바라보고 있다. ⓒ로이터

BDA 북한자금이 제 3국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송금이 추진되고 있다.

현지 은행 관계자에 따르면, BDA 50여개 북한계좌는 조선무역은행으로 통합작업 마무리 돼가고 있고, 북측이 BDA에 송금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무적인 문제에 부딪혀 다시 송금이 미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힐 국무부 차관보는 4일 BDA 송금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 북한의 고의가 아니라고 했다. 이 문제로 초기조치 이행이 늦어진다는 우려도 있지만 머지 않아 해결될 것으로 본다면서, 며칠 더 기다려보자고 말했다.

북한은 미국이 북한의 국제 신용도를 망쳐놨으니 국제송금을 통해 해결하라며 북핵 폐기 초기조치 이행 거부라는 몽니를 부리고 있지만, 힐 차관보는 북한을 달래야 한다는 말이다.

아직 세부적인 절차와 송금 과정의 문제가 남아있지만 전체적으로는 BDA문제는 해결 가닥을 잡을 것으로 관계국들은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예측대로 BDA 북한 자금이 이체된다면 2.13합의는 당분간 순항하게 될 것이다.

북한은 BDA 자금을 돌려받으면 핵시설 폐쇄에 들어가고, 그 대가로 중유 지원과 제재완화나 미국과의 관계개선 조치를 얻게 된다. 북한 입장에서 잃은 것은 별로 없고 얻을 것이 많다.

미국은 북한이 영변 핵 시설 폐쇄에 돌입할 경우 북핵폐기의 큰 진전이라면 크게 환영할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본격 핵 폐기와는 크게 상관없는 조치를 취해도 이를 과장해 마치 북한이 핵 폐기를 위한 중대절차에 돌입한 것처럼 선전하는데 정책 방향이 맞춰져 있다. 2.13합의 이후 미국의 가장 큰 태도 변화 중 하나이다.

힐 차관보는 이날 핵 불능화 조치인 2단계 방안은 몇 주내로 이행이 가능하고 올해 하반기 내로 3단계로 돌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3단계 조치는 모든 핵프로그램에 대한 신고에 해당한다. 이것이 이행되면 미북간 전면적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양자대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가 본격화 된다.

버시바우 “부시 임기 내 북 핵포기 가능할 것”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부시 임기 내 북한 핵 포기를 희망하고, 이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이 핵 포기 결단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어렵다고 말했다. 약속을 안지킬 수 있지만 타결이 될 것으로 가정하고 협상을 진행하겠다는 말이다.

미국 당국자들의 발언은 대부분 2.13합의 이행에 대해 낙관적이다. 그리고 북한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고, 북한이 잘해줄 것으로 믿고 협상을 한다고 말했다. 2.13합의 이전과 미국이 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힐 차관보는 어느 강연에서 “북한이 달라졌기 때문에 미국이 변했다”고 말했다가 청중의 웃음을 사기도 했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2.13합의를 만들어낸 베를린 협상은 미국이 먼저 요청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북한의 진지한 태도변화를 감지했고 미국은 한번 해볼만한 협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체니 부통령은 ABC 방송에 출연, “김정일이 약속을 지킬 것인가?”라는 물음에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2.13합의를 한번 해볼만한 시도라고 말했다.일부 전문가들은 이러한 미국의 태도가 북한의 약점을 쥐고 미국이 새로운 압박정책을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른 것 같다.

2.13합의 이행은 말 그대로 초기조치 이행에 대한 합의이다. 북한은 핵폐기 약속을 하지도 않고 초기단계에서 미국의 제재 해제와 대북압박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이후에도 안하무인식 협상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미국은 북한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2.13합의는 북한의 핵프로그램 목록 신고까지가 대상이다. 물론 그 다음 절차는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의 포기와 사찰이다. 북한 핵폐기의 핵심절차는 이 부분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보유한 핵무기에 대한 폐기 의사를 한 번도 밝힌 적이 없고 부시 행정부는 확신은 없지만 그렇게 믿고 협상을 하겠다고 한다.

부시 행정부 임기는 사실상 내년 말까지다. 미국 당국자들의 발언대로라면 내년까지 부시 행정부와 북한이 실천할 수 있는 핵폐기 과정은 초기조치에 불과할 것이다.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본격적인 보유 핵무기 포기 협상은 진행될지도 미지수다. 김계관 부상은 이미 보유한 핵무기는 논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북한 핵포기 결단 내린적도 없고 가능성도 낮아

그렇다면 버시바우 대사가 말한 부시 임기내 북핵해결은 무슨 의미일까? 부시 행정부는 과거 CVID와 같은 실질적인 북핵 청산은 어렵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의 비확산 의지가 담보된 상태에서 일부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것에 만족하고 그 대가로 한반도 평화협상과 북미관계 개선을 주고 받는 것이다.

미국은 CVID원칙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북한 핵을 용인하는 과정으로 가고 있다. CVID는 장기적인 원칙일 뿐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과제가 돼버린 셈이다.

북한과의 협상을 선택한 미국은 이제 북한의 자발적 핵 포기를 기대하는 입장이 돼버렸다. 북한의 잘못은 눈감아 주고 작은 부분이라도 긍정조치는 크게 포장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미국이 2.13 초기조치 시한을 넘긴 북한의 몽니에도 북한의 잘못이 아니라고 두둔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참여정부의 유화정책과 별 다를 바가 없다.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를 위해서는 모든 핵 프로그램 신고 이후 핵 시설 부품 및 각종 시설 폐기, 이미 보유한 핵무기 폐기, 사찰단의 전 국토 사찰 및 관계자 심문 등의 절차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최소한 보유 핵무기 폐기에 대한 협상 시한이라도 나와야 북한의 핵폐기가 가능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개선 협상 등 부대조건들을 협상하기 위한 기구는 잔뜩 만들어 놓고도 정작 이러한 절차를 이행하는 대략적인 로드맵에 대해서는 한사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나이브한 희망대로 북한은 계속 따라줄까. 미국과 약속을 지키고 싶은데 실무적인 문제 때문에 초기조치 이행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북한이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김정일의 전략이 근본적으로 변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북한은 핵 포기 결단을 내린 적이 없고, 그럴 가능성도 낮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북한은 이미 보유한 핵무기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고서도 부시 행정부 임기 동안 목표였던 사실상 핵 보유국 지위, 시간 끌기, 몸값 높이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접근은 북한 입장에서 손해볼 것 없는 장사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 관료들이 나서 어떤 경고를 해도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있다. 미국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 국무장관이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고,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지만 북한은 오히려 무시하고 있다. 일절 반응이 없다. 과거 부시 앞에서 초조한 북한이 목소리를 높이던 것과 전혀 달라진 태도이다.

이라크라는 수렁과 미국 대선을 앞두고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건드릴 재간이 없다는 점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더구나 부시 행정부가 북핵 업적이라는 정치적 계산을 통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미국은 북한에게 종이 호랑이에 불과한 신세가 돼버렸다.

BDA 문제가 해결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향후 북핵 국면은 산 넘어 산이다. 북한의 단계적 핵 폐기 조치를 미국이 두 손 들어 환영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겠지만, 북한의 의도가 분명한 이상 이러한 협상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보는 사람도 재미가 없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우리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를 간교한 김정일과 노쇠한 부시에게 맡겨두고 있는 우리의 처지가 처량하기까지 하다. 하기사 철부지 노무현 대통령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협상이 가능하다고 보면 남탓만 할 것도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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