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역사소설, 일본이 조선인 빼앗는데만 관심”

“조정래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빼앗고 겁탈하고 죽이는 데만 관심을 두었다. 그의 소설은 20세기 김제 역사의 본류를 완전히 비켜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전의 글에서 소설가가 ‘끝내 그 지역의 진(眞)의 역사와는 무관한 이방인으로 그 바깥을 맴돌았을 뿐이다’고 했던 것이다.”

1일 발간 예정인 뉴라이트 사상·이론지 시대정신 가을호가 여름호에 이어 소설가 조정래 씨의 역사소설 ‘아리랑’을 재비판하고 나서 주목된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사진)는 “벽골제는 바닷물의 침입을 막는 방조제였다”며 “흔히 벽골제를 큰 저수지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조정래 씨는 소설 아리랑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온 벽골제 근방의 비옥한 토지를 일본인이 강제로 수탈했다고 주장한 반면, 이 교수는 일제시대 개간사업이 이뤄진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교수는 시대정신 여름호에서 “‘아리랑’의 주무대인 김제평야가 소설에서처럼 원래부터 비옥한 땅이 아니라 황무지였으며, 곡창지대로 변한 것은 일제 식민지기에 개발된 수리사업 때문이었다”면서 “조정래는 그 문제를 소설의 줄거리로 다루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조 씨는 대학강연 등을 통해 “김제에는 백제시대부터 벽골제라는 국내 최대의 수리시설이 있었다”면서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고 공격했었다.

그러자 이 교수가 현장을 다시 답사하고 당시 ‘동국여지승람’ 등 당시 지도와 사료 등을 검토한 결과를 바탕으로 조 씨의 주장을 다시 반박하고 나선 것.

이 교수는 “15세기 초 ‘세종실록지리지’ 김제군편을 보면, 벽골제에 대해 ‘신라 흘해왕 21년에 비로소 둑을 쌓았는데, 길이가 1800보다. 본조 태종 15년에 다시 쌓았으나 이익은 적고 폐단은 많았으므로 곧 허물어뜨렸다’라고 돼있다”면서 “조선왕조 500년 내내 벽골제는 허물어진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벽골제의 기능에 대해 1917년 김제군 죽산면 일대 지도와 1872년 전라북도 김제현 지도를 제시하면서 “지도를 자세히 살피면 벽골제의 동과 서로 넓은 평야가 펼쳐 있고 자연 상태의 구릉인 벽골제 북단의 포교리와 남단의 초승리를 연결하는 방죽을 세워 동쪽의 넓은 평야를 바닷물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했다”며 “이로부터 벽골제의 원래 기능이 방조제였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아리랑’이 시작되는 1904년으로 돌아가면 소설의 주무대인 죽산면 일대에는 갯논이 펼쳐 있었고 김제·만경 일대에 분포한 대부분의 저수지가 토사로 막혀 언답과 언전으로 바뀌어 있거나 갈대밭으로 방치 상태였다”고 결론내렸다.

이 교수는 “작가 스스로도 ‘바닷물의 염기를 피할 수 없는 갯논은 소출이 평답의 절반에 불과하며 그것도 하늘이 까탈을 부리지 않고 너그럽게 넘어 갔을 경우에 한하여 가뭄을 제일 먼저 타고 홍수에 제일 먼저 내려앉는다’고 설명했음에도 (일제 식민지 시기) 소설의 주무대에서 벌어진 방조제 공사 등 수리사업 등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조정래가 연대기형 역사소설이 요구하는 치밀한 준비작업을 생략한 채 원고지와 만년필만으로 소설을 시작했다”고 비판한다.

“1908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이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교민들이 장인환의 변호를 위해 재판정에서 통역할 사람을 구하는데, 하바드에서 석사학위를 딴 이승만이 초청되었다. 1908년 7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은 재판이 늦어지자 논문을 써야 한다며 매정하게 돌아가고 만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살인자의 변호에 협조할 수 없다는 말도 남겼다.(‘아리랑’ 본문 중) 그렇지만 이승만이 하바드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한 것은 1908년 8월의 일이고(석사학위 취득은 1910년의 일), 9월에 프린스턴 박사과정에 입학하였기에 급하게 (박사)논문을 쓸 일도 없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실재 인물을 이렇게 얼토당토않게 욕을 보여도 좋은지 모르겠다.”

그는 소설에 등장하는 다수의 사례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음을 실증 사례를 들어 오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특히 소설에서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행정구역인) 죽산면 외리의 차갑수는 그 있지도 않은 당산나무에 묶여, 있지도 않은 ‘조선경찰령’에 의거하여 총살을 당하였다”면서, “확인결과 (죽산면) 외리에 그가 이미 있다고 쓴 당산나무가 없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이 교수는 “소설은 토지조사사업 전 기간에 걸쳐 이런 사례가 전국적으로 4000여 건이나 되었다고 했지만, ‘조선경찰령’따위의 법령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벽골제 앞에 위치한 조정래 문학관에 ‘차갑수를 총살에 처한 당산나무의 사진’이 걸려있는 사실을 거론하며 “그 사진은 어느 마을의 당산나무를 찍어 온 것인가. 박물관까지 이렇게 허위로 치장해도 좋은가”라며 통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