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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는 다 죽고, 사슴은 도망가고 이제 승냥이와 여우만 남았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식량난)’을 지나면서 북한 사회 전반에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풍조가 팽배해지자 주민들이 이런 세태를 꼬집으며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식량난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북한 주민의 생활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국가 통제는 약화되고 개인 돈 벌이가 성행하면서 심각한 부패와 범죄가 만연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요즘처럼 살벌해서는 마음 놓고 장사하러 다니기도 겁난다”고 말하기 일쑤다.
양강도 혜산에서는 최근 두 달 사이 20∼30대 여성에 대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해 혜산시 보안서가 발칵 뒤집혔다. 살해 당한 여성들은 모두 타 지방에서 양강도로 물건을 나르는 열차 장사꾼(북한에서는 달리기라고 부름)들로 추정되고 있다.
혜산으로 달리기를 오는 여성들은 대부분 함경도에서 수산물이나 약초 등을 싣고 와 팔고, 중국 상품을 구입해 해당 지역으로 돌아간다. 11월 한 달 사이에만 이들 중 세 명이 살해당했다. 이달 들어서도 한 명의 여성이 추가로 살해됐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이들은 모두 20대 후반에서 30대 사이로 범인이 시신에서 신분 증명서를 모두 가져가 신원 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보안 당국은 장거리 장사에 나선 여성들의 뭉칫돈을 노린 범행으로 추정하고 있다.
올해 큰 홍수 피해를 입은 평안남도와 강원도, 황해도에서는 군인들이나 무직자, 불량배들이 백주 대낮에 행인들을 상대로 돈을 강탈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생존 환경이 열악해지다 보니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황해도 지역에서는 군인들이 지나가는 트럭을 세우고 장사꾼들의 돈과 짐을 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과거에는 군인들이 화물을 싣고 가는 트럭이나 차량을 세우고 일부 짐이나 음식을 뺏는 정도에 그쳤으나 지금은 주민들의 짐을 빼앗고 주머니를 직접 털고 있다는 것. 그 방식도 갈수록 난폭해져 나이 많은 여성들에게도 욕설과 폭력을 일삼는다고 한다.
북한은 전력사정이 악화돼 열차 운행이 지연되거나 운행 시간이 하루 이틀을 넘기는 것이 다반사다. 따라서 먹고 살기 바쁜 장사꾼들을 실어 나르는 일명 ‘벌이차’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이러한 ‘벌이차’가 요즘 들어 강도들의 주요 약탈 대상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트럭 주인과 군인들이 공모해 트럭에 장사하러 나가는 주민들을 태우고 이동하면 군인들이 예정된 지점에서 나타나 차를 정차시키고 강도 행각을 벌이기도 한다. 따라서 대규모 도매상들은 특수부대 출신 제대군인을 호위병으로 두고 강도에 대응하고 있다.관련기사바로가기
탈북자 오명순(가명·49) 씨는 황해도 해주-사리원 ‘벌이차’를 타고 오다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고 한다. “행인들이 화주에게 차비를 냈는데, 도중에 세우고는 차비를 더 내야 가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행인들이 차비를 또 냈다”면서 “이동 중에 군대가 나타나 ‘같이 먹고 살자’며 물건과 돈을 빼앗는 것은 일도 아니다”고 말했다.
오 씨는 “오죽했으면 황해도지역을 여행하려면 돈을 어떻게든 숨기고 다녀야지 안 그러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돼 꽃제비(부랑아) 꼴이 난다는 말까지 있다”고 말했다.
북한판 ‘퍽치기’도 주민들을 위협하고 있는 신종 범죄다. 대로 변에 일반 행인처럼 길을 가다가 자전거가 지나가면 순식간에 자전거를 탄 사람의 뒤통수를 치고 자전거를 강탈하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심지어는 여성들이 자전거에 태워달라고 하고 운전자의 뒤통수를 망치로 치고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젊은 여성들이 불량배들과 짜고 역전에서 성매매로 행인을 유혹해 골목으로 끌어들인 다음, 돈과 물건을 빼앗는 사건도 빈발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승냥이와 여우만 살아 남았다’고 하는 말에서 ‘승냥이’는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강도를 비유한 말이고, ‘여우’는 각종 수법의 협잡으로 사람들의 돈을 뜯어내는 사기꾼들을 비유한 말이다.
만성화된 북한 경제난이 북한 주민들을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죄 행위로 내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