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이 재등장했다. 무슨 일인가?

장성택(張成澤). 김일성 사망 후 줄곧 그는 ‘북한의 2인자’, 혹은 ‘실세(實勢)’라고 불려왔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도 2003년 7월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김정남(김정일의 장남)이 2인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2인자는 장성택”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북한에서 쿠데타 등이 발생했을 때) 김정일의 과도적 후계자는 장성택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는 장성택이 쿠데타를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 아니라, 장성택만큼 북한의 당,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전 분야에 고루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김정일 공백 시 혼란을 수습하려면 어쨌든 김정일만큼 북한체제 운영에 경험 있는 사람이 수뇌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인물은 장성택밖에 없다.

최초의 ‘김정일맨’ 장성택, 그가 사라진 이유는?

장성택은 김정일의 매제(妹弟)다. 김정일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김경희와 결혼했다. 김경희에 대한 김정일의 애정은 각별하다. 이복동생들과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혈육의 정은 동지적 유대감으로 높아졌는데, 거기에 장성택이 한 몫을 했다.

장성택은 김경희와 결혼(1972년)한 이후 ‘김정일맨’이 되어 김정일이 절대권력을 다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정일이 제손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온갖 지저분한 일들을 장성택이 도맡아 했으며, 김정일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는 ‘당 청년사업과 3대혁명 소조사업’을 맡아 김정일의 젊은층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런 장성택이 2003년 7월 이후 공식석상에 나오지 않자 와병설, 숙청설 등이 나돌았고, 2004년 초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소식통들이 “장성택은 업무정지 처분을 받고 근신하는 중”이라고 전하면서 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이 확인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고영희(김정일의 처)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났다는 설이 유력했다. 김정일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고영희 소생 자식들(정철, 정운)을 지지하는 세력이 차후 강력한 경쟁세력이 될 수 있는 장성택 세력을 몰아내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2004년 7월경 고영희가 사망하면서 후계구도는 미궁에 빠져들었고, 장성택이 복귀할 수 있다는 예측이 잠깐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 9월, 북한이 장성택 일파를 ‘곁나무’로 지칭하면서 “장성택과 냉면 한 그릇이라도 먹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숙청되는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으며, 김경희도 알코올 중독 등으로 정신치료를 받고 있다고 알려져 장성택의 복귀를 완전히 물 건너간 것으로 관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 지난 28일, 장성택이 2년여 만에 얼굴을 드러냈다. 김정일과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포착된 것이다. 그럼 장성택은 완전히 복귀한 것일까?

장성택 길들이기 설(說)

장성택이 업무정지 상태에 있다는 것은 여러 통로를 통해 확인되었다. 지난해 6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이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오찬을 할 때, 남측에서 묻지도 않았는데 김정일은 “장성택이 남조선에서 폭탄주를 너무 먹고 몸을 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쉬도록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장성택이 남조선에서 폭탄주를 너무 마셨다는 말은 2002년 10월 경제시찰단으로 왔을 때의 일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장성택은 9일간 남한에 머물렀는데, 밤마다 고급양주로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고 유흥업소까지 드나들었다고 알려졌다. 장성택이니까 이런 행동이 가능하지, 다른 북한 고위인사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장성택이 북한에서 갖고 있는 ‘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정일의 말은 그런 장성택을 비꼬는 말일 수도 있고, 여하튼 장성택을 제어하는 측면에서 업무정지 처분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장성택은 1978년~1980년에도 일반노동자로 쫓겨나 용광로에 쇳물을 부으며 ‘혁명화’ 과정을 거친 적이 있다. 김경희의 고발에 의해서였다. ‘남편이 허구헌날 술만 마신다’고 오빠 김정일에게 일러바쳐 이런 조치를 취한 것으로 전한다.

친자(親子) 승계 방해하는 ‘곁나무’ 숙청설(說)

후계문제를 둘러싼 고영희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장성택이 밀려났다는 설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으며 구체적이다. 실제 장성택의 신상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이후, 장성택과 친분이 있는 북한 고위인사들이 줄줄이 좌천됐다.

인민보안상 최룡수, 남포시당 책임비서 리영복, 무역상 리광근,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최춘황, 국제부 부부장 지재룡 등이 대표적이다. 중앙간부만 40여명이 좌천됐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장성택 세력을 ‘곁나무’라고 부른 것은, 김정일이 김성애(김일성의 후처)와 이복동생 세력을 숙청하면서 ‘곁가지’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한번 그런 식으로 종파의 이름이 붙으면 북한에서 정상적 수순을 밟아 복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가지보다 큰 ‘나무’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원래 본류가 다르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곁가지’는 김일성이라는 한 나무에서 나기는 했으나 가지가 다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형식상의 복귀 가능성

그런데 그 나무의 뿌리를 뽑아버리지 않고 왜 재등장 시켰을까?

첫째, 애초에 장성택의 근신이 고영희 세력과의 권력투쟁과 연관이 없고,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징계의 성격에만 머물러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행동을 이유로 직접 연관이 없는 중앙간부들을 대거 좌천시킨 것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

둘째, 권력투쟁에서 장성택 세력이 승리했을 가능성을 점치는 의견도 있다. 최근 김정일이 후계문제 언급을 금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후계문제로 피해를 입은 장성택을 복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 체제의 성격상 일단 종파로 낙인 찍은 중심인물을 쉽게 복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셋째, 수족이 잘린 장성택을 허울만 남겨두고 복귀시켰다는 의견이다. 실제 1970~80년대 곁가지 청산으로 김정일은 이복동생들의 모든 권력을 박탈했지만 철저한 감시 속에 그들의 일정한 신분을 보장해주고 있다. 김정일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이복동생인 김평일은, 원래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 폴란드 대사 등 외국만 맴돌고 있다. 김영일도 독일, 몰타 등을 떠돌다 간경화로 사망(2000년)했고, 김성애도 1998년까지 여맹위원장을 맡아 왔으나 북한 고위층들은 그와 이야기하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완벽하게 소외되었다.

그래서 장성택 역시 동생 김경희의 남편이다 보니 함부로 하지는 못하고 과거 곁가지와 같은 최후를 맡게 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다. 이번에 텔레비전을 통해 얼굴이 비친 것도 오히려 ‘곁나무 정리가 완료됐다’는 선포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동정을 전하는 방식으로도 충분할 텐데 김정일의 바로 뒤에 자리를 잡은 것에 다른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는 반론도 있다.

넷째, 실무공백을 메우기 위한 ‘긴급수혈’이라는 의견도 있다. 지난해 연형묵의 사망으로 인해 발생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장성택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올해 초 김정일의 중국방문 이후 개방정책을 확실히 할 것이 분명한데, 이것을 보조할만한 장악력을 갖춘 인물 또한 장성택밖에 없다는 근거를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권력 안정을 다른 무엇보다 중시하는 김정일이 인물의 능력을 우선시해 인사를 할 가능성은 없으며, 장성택은 그동안 개방정책을 누구보다 반대해 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