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주체사상의 변질

이 책 서문에는 “남과 북 사이의 철학적 만남의 모색, 나아가서는 그 철학적 만남의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이 북한주체사상의 창시자인 황장엽과 장기간에 걸친 학술적 토론을 진행하는 가운데 그러한 만남의 방식을 모색해 왔으며, 여기에 실린 글들은 그 모색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남북의 철학적 만남

이 책은 ‘인간중심철학’의 내용과 체계에 대한 소개와 다양한 입장에서의 비판적 검토를 중심목적으로 기획되었다.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은 『인간중심철학의 몇 가지 문제』, 『세계관』, 『사회역사관』, 『인생관』 등 남한에서 발간된 저서들에 집약되어 있다. 이 책은 황장엽의 위의 저서들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논문들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은 “존재론과 역사철학, 정치철학 및 윤리학의 영역에 걸쳐 하나의 일관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논의의 대상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에서 나타나듯이 북한의 주체사상과 구별되는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을 학술적 논의의 전면적인 대상으로 삼았다는 의미가 있다.

아울러 이 책의 논문들은 인간중심철학은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에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가 가지는 문제점과 한계들을 반성하는 동시에 현존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봉착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적극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인간중심철학과 주체사상

이 책이 기존의 주체사상 논의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북한의 통치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과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구분은 황장엽이 본래 만들어낸 주체사상이 북한 통치권력에 의해 심각하게 변형, 왜곡되었으며, 우리가 알고 있던 주체사상은 후자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북한의 전제통치 하에서 황장엽의 본래의 주체사상은 공개되거나 공식화될 수 없었고, 통치자의 필요에 따라 재구성된 주체사상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북한 주체사상의 실질적 창안자인 황장엽의 남행(南行)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에게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인식이다.

황장엽은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해 “북한의 주체사상은 인간중심의 세계관과 마르크스주의적 계급주의, 수령주의라는 세 가지 이질적 요소의 결합체”라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북한 통치자들이 선전하고 있는 주체사상은 세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 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전체주의와 계급주의, 봉건주의를 결합시킨 수령절대주의 사상이며,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한 흔적인데 여기서 기본으로 되는 것은 계급투쟁이며 무산계급독재이론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면은 우리가 개척한 인간중심사상을 왜곡한 부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북한의 주체사상에 강한 민족주의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겠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인간중심철학을 왜곡한 가장 대표적인 대목은 수령론에서 볼 수 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역사발전의 주체인 인민대중이 자주적인 혁명사상을 가지고 자기운명을 자체의 힘으로 개척해 갈 수 있기 위해서는 영도자로서의 수령을 절대적으로 요청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요컨대 사회정치적 집단의 생명의 중심은 이 집단의 최고 뇌수인 수령이며, 인민대중은 이 뇌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생물학적 유기체의 수족이라는 것이다.

인간중심철학과 마르크스주의

지난 80년대에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주체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면서, 주로 형성된 논점은 주체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차별성의 문제였다. 이미 80년대 초부터 마르크스주의가 학생운동권에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논쟁은 상당히 심각한 갈등을 동반하였다.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독창적이면서 동시에 계승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 둘을 적당히 조화시키고 있다는 주장을 하였고, 당시 이른바 주사파들은 대체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의 본래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인간중심철학은 철저히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황장엽에 의하면 인간중심철학은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이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론이 틀렸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중심철학은 마르크스주의의 개별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어 결국에는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극복해내는 길로 가게 된다.

인간중심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차별성은 우선 존재와 의식의 관계에 대한 정의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마르크스주의는 의식의 본질을 단지 객관세계의 반영으로 보면서 의식의 능동적 작용을 과소평가 하였다.

마르크스는 인간 -즉 인간의 마음, 욕구, 희망, 공포, 기대, 개별적 인간의 동기와 야망- 모두는 사회의 창조자라기보다 그 산물이라고 보았다. 반영된 것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인데, 그림자가 능동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반면 인간중심철학에서는 의식의 물질에 대한 능동적 작용을 강조하는 차원을 벗어나, 의식을 가진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명제를 성립시킨다. 즉 정신을 가진 발전된 물질적 존재인 인간이 정신을 못 가진 저급한 물질적 존재에 대하여 우위성을 가진다는 것은 명백하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반영론에 기초하여 정신의 피동성과 물질의 능동성, 정신에 비한 물질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유물론이 잘못되었다고 평가한다.

사회역사관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는 그 사적유물론에서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필연적 법칙에 따라 역사는 전개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과 불가피성이 도출된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과학적>이라는 말과 <결정론>이라는 말은 동의어는 아니라 하더라도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일종의 미신이 생겨버렸을 정도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결정론적 역사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는 생산자에 대한 생산의 지배가 없어질 때에야 인간은 처음으로 그 자신의 사회적 환경의 주인이 됨으로써 자연의 의식적이고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공산주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은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들며, 그것은 ‘필연의 영역’으로부터 ‘자유의 영역’으로의 인간의 도약이라고 표현한다.

반면 인간중심의 사회역사관은 사회적 운동의 주체를 인간으로 보는 역사관이다. 미래는 우리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요, 우리가 역사적 필연성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만사는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이 일어나든 그와 대결하여 투쟁을 벌일 생각을 아예 하지 않게 될 수 있는 마르크스의 결정론적 맹점을 인간중심철학은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중심철학의 의의

인간중심철학의 내용에 대해서 ‘공자님 말씀’처럼 그저 당연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중심철학 외에 사람을 세계와 자기운명의 주인으로 명확히 규정한 철학은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다. 사람을 중시하는 경향의 철학이론은 존재하였지만 인간중심철학처럼 이를 체계화하고 선행철학과의 관계에서 규명하는 철학사상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중심철학의 독창성은 평가될 가치가 충분히 있다. 또한 사람이 세계와 자기운명의 주인이라는 인식이 이미 상식화되어 있다는 평가도 적절하지는 않다. 여전히 모든 종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자유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에 주목하지만 인간 자체를 특별한 어떤 존재로 규정하지 않는다.

인간중심철학이 현시대의 조류와 부합되는 측면이 많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현시대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로 지식정보화가 거론된다. 이는 결국 생산의 제 요소 중에서 인간이 중시된다는 의미이다. 물질적 요소보다는 인적요소가 점차 더 중요해진다는 현실변화는 인간중심철학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사회가 발전할수록 인간의 예측능력과 사회통제능력이 발전해 간다는 사실도 인간중심철학의 문제의식을 특별히 주목하게 한다.

한편 인간중심철학은 철학적 원리는 정리되어 있지만, 아직 이를 각 분야에 적용하여 이론화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경제학 같은 분야에서 인간중심철학을 적용하면 어떤 이론이 나올 수 있는지 아직은 그 답이 없는 것 같다. 인간중심철학의 기왕의 민주주의 이론이나, 사회주의 비판이론 등도 기존의 자유주의 이론과 거의 다르지 않다.

즉 인간중심철학을 전제하지 않고도 민주주의론이나 사회주의 비판이론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중심철학이 철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이론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한국학계의 인간중심철학에 대한 무관심부터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The DailyNK 기획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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