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 회화 형편없는 김정일 땀 뻘뻘 흘려”

▲ 미국 워싱턴 DC 근교 자택 서재에 앉은 김현식 전 김형직 사범대학 교수 <김영사 제공>

“지금은 독재자가 되었지만 그도 어릴 적에는 부끄러워 볼을 붉히던 소년이었다. 그의 마음에 아직도 이런 사람다움이 남아있기를, 그래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북한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기를, 그리고 마침내 큰 결단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김형직 사범대학 교수 출신으로 김일성 일가의 가정교사를 지낸 김현식(75) 예일대 초빙교수가 귀순 15년 만에 펴낸 자서전「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김영사)에는 무너져가는 북한 사회에 대한 노(老)지식인의 쓰라린 안타까움이 배어나왔다.

그는 “내 소원은 북녘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이라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들을 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김정일은 북한을 개방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38년간 대학 강단에서 북한 최고 엘리트 학생들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쳤던 김 교수는 1971년부터 20여 년간 김성애(김일성의 두 번째 부인) 조카들의 가정교사를 맡기도 했다.

그러다 1991년 국립 러시아사범대학 교환 교수로 파견되면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뒤바뀌게 된다. 러시아에서 6·25전쟁 때 헤어진 누나를 극적으로 재회하게 된 그는 이 사실이 북한 당국에 발각되면서, 1992년 한국으로 귀순했다.

당시 북한에는 아내와 아들, 며느리, 두 딸과 다섯 손자들이 남아 있었다.

15년 전 모스크바에서 장남에게 선물로 주려고 산 전자계산기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는 그는 자서전의 앞머리에 “가족들의 명복을 빌며 이 책을 바친다”고 적었다.

김 교수는 김정일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고급 중학교(고등학교) 3학년이던 김정일의 러시아어 실력이 형편없음을 알고 조바심이 난 김일성은 김 교수에게 김정일이 다니던 학교로 검열(시험)을 나갈 것을 지시했다.

“北 현실 외면한 ‘북한 전문가’에 할 말 잃어”

“권력을 틀어쥔 김정일은 포악하고 변덕스럽게 알려져 있지만, 내가 처음 보았던 김정일은 그렇지 않았다. 김정일의 러시아어 수준을 테스트하는 자리였는데, 문법은 좀 됐는데 회화는 형편 없어서 이마에 땀을 송글송글 흘리던 모습이 생생하다.”

김정일의 러시아어 실력에 화가 난 김일성은 “남산학교에서 러시아어 회화를 못하는 교원은 모조리 잘라버리라”고 불같이 화를 냈다. 이후 북한은 문법 위주의 러시아어 수업을 회화 위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촌과 이복동생을 물리치고 권력을 손에 넣은 김정일은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라는 ‘십계명’을 만들며 독재자로써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정일의 십계명은 자기 자신을 신격화해서 ‘수령은 오직 자기 가계에서만 계승되니 어느 누구도 탐내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였다”며 “김정일의 10대 원칙이 발표되자마자 중앙당에서는 전 국민에게 한 달 안에 모두 통달(암송)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서울에 와서 많은 북한 연구자들을 만나게 됐는데, 그들은 북한의 정책을 말할 때마다 헌법과 당 규약 등에서 법적 근거를 찾는다”며 “그들의 학자적인 태도에 너무나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어버린다”고 말했다.

이어 “수령의 독재 하에 있는 북한에서 국가의 기본법은 헌법이 아니라 김정일의 10대원칙”이라며 “북한의 실상을 모른 채 ‘학문적으로만’ 북한을 연구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답답함은 학자들에게서만 아니라 남한 사회 곳곳에서 느끼는 것”이라고 탄식한다.

김 교수는 그래도 “김일성은 적어도 인민을 위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며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통째로 물려주고 추하게 늙어갔다”며 “한때는 굶주리는 인민이 없는 지상낙원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아들에게 권력을 내주고는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권력을 아들에게 넘겨준 뒤 판단력도 잃어버렸으며, 아들에게 아부 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와 함께 북한도 형편없이 망가져 갔다”며 쓰러져가는 조국에 대한 서글픈 안타까움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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